나노테크의 꽃 '원자현미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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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기네스북이 공인한 세계에서 가장 작은 글씨는 우리나라 조각가 김대환(69)씨의 것이다.

그는 쌀 한톨에 반야심경의 한자 2백83자를 새겨 넣어 1990년 '가장 미세한 조각품'분야 기네스북에 올랐다. 맨눈으로는 읽을 수 없고 현미경으로 봐야 할 정도다.

이런 김대환씨의 작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글씨와 그림을 만드는 과학자들이 있다. 그들이 그린 그림은 우표 한장 위에 1억장을 늘어놓을 수 있고, 글씨는 가로·세로 1㎜ 안에 6백만자를 써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작다. 워낙 작아 세포를 관찰하는 광학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고, 원자 하나하나를 볼 수 있는 원자현미경을 사용해야 글씨를 읽을 수 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나노(1㎚=10억분의 1m)'의 세계를 다루는 과학자들이다.이들의 목표는 지금의 D램보다 훨씬 집적도가 높은 기억 소자를 만드는 것.

원자 몇개 크기의 탐침

나노 과학자들이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도구는 원자현미경이다. 원자현미경은 '보는' 장치지만, 특수한 구조 때문에 선을 그리는 도구로도 쓸 수 있다. 원자현미경에는 굵기가 원자 몇개 정도 밖에 안되는 뾰족한 탐침이 달려 있어, 이를 표면 위에서 전후좌우로 움직여 선을 새기는 것이다.

또 탐침에 전기를 가하는 등의 방법으로 원자들을 끌어 모아 적절히 늘어서게 하는 방법으로 '원자들의 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처럼 극미한 선을 그리는 기술은 아주 작은 전기회로를 반도체에 새겨 집적도 높은 기억소자나 연산장치를 만드는 데도 이용할 수 있다. 실제로 나노 과학을 이용한 새로운 정보저장 기술들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정보를 저장하는 속도가 D램 반도체에 비해 크게 뒤지는 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많이 남아 있다.

목표는 고집적 반도체

◇나노 잉크=미국 노스웨스턴대 채드 머킨(화학과) 교수팀은 99년 '나노 잉크'라는 것을 고안했다.

원자현미경의 탐침에 특수한 유기분자들을 묻힌 뒤 금판 위에 글씨를 쓰는 방법이다. 마치 탐침이 펜촉, 유기분자들은 잉크, 금판은 종이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획의 굵기가 15㎚ 정도인 글씨를 쓸 수 있다.15㎚는 흔히 쓰는 0.5㎜ 샤프심 굵기의 약 3만분의 1이다. 머킨 교수팀은 이 방법으로 영어 1백50단어 분량의 문장을 쓰는 데 성공했다.

글자 크기는 가로·세로 1㎜ 안에 6백25만자가 들어갈 정도였다. 이는 두달치 신문에 실린 글자와 맞먹는 양을 점 하나 크기 안에 써 넣은 것이다.

◇산소 원자로 그린 초상화=러시아의 나노기술 전문회사 NT-MDT사의 연구팀은 금속이나 반도체 표면에 전기를 가해 주면 산소 원자가 달라붙는 것을 이용해 작은 그림을 그린다. 표면에 붙는 산소원자의 배열이 선을 이뤄 그림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NT-MDT사는 이를 이용해 가로·세로 2㎛ 크기의 초상화도 그렸다.가로·세로 2㎝인 보통 크기의 우표 위에 1억개를 늘어놓을 수 있는 크기다.

◇전기 글자=직접 원자나 분자를 늘어놓는 것과 달리 물질 속에 있는,+ 전기를 띤 작은 입자가 글씨나 그림 모양으로 늘어서게도 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서울대 BK-21 물리연구단 홍재완 박사가 지난해 이 기술을 개발했다. 홍박사는 양전기를 띤 입자들이 서울대 로고 모양으로 늘어서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전체 크기는 가로·세로 약 14㎛로 세포 한개 정도인데, 그 안에 복잡한 서울대 로고 무늬가 다 들어가 있다.

홍박사는 "다른 방법은 CD롬처럼 한번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 그만이지만, 이 방법은 하드디스크처럼 쉽게 지웠다 다시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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