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제2부 薔薇戰爭 제2장 揚州夢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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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먼 훗날 장보고가 흥덕대왕에게 "중국의 어디를 가나 우리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고 해적들이 사람을 약취하여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바라나이다"라고 아뢰었다고 『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장보고는 해적들에게 약취되어 노비로 팔려가는 신라인들의 비참한 모습을 노예선에서 직접 눈으로 목격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노비들은 노예선에 감금되어 짐승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포박되어 있었으며, 오랜 항해 끝에 병들어 죽으면 그대로 바다에 던져 수장시켜 물고기의 밥이 되도록 하였다.

장보고와 정년은 해적들의 만행에 비분강개하였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장보고는 810년께 무사히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입국하게 되는데 이 때 장보고의 나이는 22살이었고, 정년은 그보다 어린 갓 스물의 청년이었다.

두목은 『번천문집』에서 '장보고의 나이는 30세이고, 정년은 그보다 열 살이나 젊어 장보고를 형이라 불렀다'고 기록함으로써 두 사람의 나이 차이를 10년이라고 분명하게 못 박고 있으나 이는 두목의 의도적인 작의 때문인 것이다. 실제로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10년이라면 장보고가 입당하였을 때 정년은 12세의 소년으로 이는 앞뒤의 정황으로 보아 이치가 맞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두목이 장보고와 정년을 어떻게든 안사의 난을 평정하였던 당나라의 영웅 곽자의와 이광필에 대비함으로써 장보고를 불세출의 영웅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장보고와 곽자의를 쌍둥이처럼 닮은 인물로 묘사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실제로 곽자의는 697년 태생이고, 이광필은 708년 태생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11년이었다. 따라서 두목은 정년이 장보고보다 나이가 적어 형이라 불렀던 것은 정확하였지만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곽자의와 이광필의 경우를 빌려와 10년이라고 못 박고 있었던 것이다.

장보고와 정년이 당나라에 들어와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장사였다.

그 무렵 신라인들은 대운하변을 따라 밀집되어 살고 있었는데, 이들 신라인의 거주지역을 신라방(新羅坊)이라 하였다. 그 중심지는 초주(楚州)와 연수향(連水鄕)이었는데, 신라인들은 도시의 한 구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여 자치구를 형성하고 있었다.

신라방에서는 그 장으로 총관(總管)이 있었고, 그 아래 전지관(全知官)이 있어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또한 역어(譯語)라는 통역관이 있어 교역업무를 주관하는 등 독자적인 행정구역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비단 도시뿐 아니라 촌락에서도 신라인들을 총괄하는 자치적 행정기관인 구당신라소(勾唐新羅所)가 있어 일정한 지역 내의 신라사회를 관장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치밀하게 점조직 된 신라방에 살고 있던 신라인들은 주로 상업행위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라인들은 주로 상업·운송업·무역업·조선업 등의 상공업에 종사하였고 수부(水夫), 공인(工人) 등 이와 연관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장보고와 정년은 비록 공험이라고 불리는 통행허가증이 없이 밀입국하였으나 신라방에 살고 있는 신라인들의 도움으로 곧 상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무역업이나 운송업에 종사할 수는 없었고, 가장 낮은 장사였던 소금과 목탄장사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신라인들은 주로 숯이라 불리는 목탄과 소금생산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고 있었는데, 당시 목탄은 잘 타고 연기가 없어 장안에 사는 귀족들의 찻물이나 연회음식을 만드는데 가장 좋은 연료로 쓰였을 뿐 아니라 한겨울에 난방용으로도 인기가 있었던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당시 목탄은 오늘날 산동(山東)성에 있는 밀주(密州), 대주산(大珠山)일대에서 대량 생산되고 있었다.

이 산은 울창한 산림지대로 질 좋은 목탄이 생산될 수 있을 만큼의 지리적인 여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밀주의 목탄은 신라인들의 특산품이었는데,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도 그 당시 신라인들이 목탄을 독점하고 있음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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