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5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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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로써 김춘추로부터 계승되어 온 무열왕계의 왕위세습은 단절되었으며, 이후부터는 자신들을 신라 내물왕(奈勿王)의 후손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원성왕계의 일가에 의해서 왕위가 독점계승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1백년 이상 신라의 통일 귀족을 자부하면서 온갖 특권과 영화를 누려오던 무열왕계의 진골세력들이 마침내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니 바로 이것이 김헌창의 난이었던 것이다.

김헌창은 자신의 아버지 김주원이 선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했는데 이 왕위를 불법으로 원성왕이 찬탈하였으니 마땅히 이를 뒤집어 국기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었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는 이때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으므로 군신들은 곧 후사를 논의하였다. 왕의 족자(族子)인 김주원을 세우려하였다. 주원은 그 집이 경의 북쪽 20리에 있었는데 그 때 마침 큰 비가 와서 알천(閼天)의 물이 불어 주원이 즉시 오지 못하니 혹자는 말하되 '인군의 큰 자리는 본래 사람의 계략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혹시 주원을 세우지 못하게 하려함이 아닌가. 지금 상대등 경신(敬信)은 제왕의 아우로 덕망이 본래 높고 인군의 자격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중신들은 만장일치하여 그를 세워 왕위를 계승케 하니 얼마 아니하여 비가 그치고 국인들은 다 만세를 불렀다."

이 기록을 보면 마땅히 선덕의 왕위를 계승받아야 할 사람은 김주원이고, 폭우를 빗대어 하늘의 도리를 핑계 삼아 왕위에 오른 김경신은 이른바 친위 쿠데타로 왕권을 빼앗은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은 이후 무열왕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계속 무진(武珍).청주(菁州).웅주(熊州) 등 지방의 장관을 돌아다니며 중앙권력에서 소외되어 홀대를 받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822년 지금의 공주인 웅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였고,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는 등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 하였던 것이었다.

반란세력은 삽시간에 무진.완산.사벌 등 4개주를 장악하였고, 전국으로 들풀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던 국가의 운명을 바로잡기 위해서 김충공은 실제로 말을 타고 전쟁에 뛰어들어 문화관문(門火關門)을 지키기도 했었다.

결국 김헌창의 난은 그의 중요 거점인 웅진성이 함락됨으로써 자신들의 종자들에게 머리와 몸을 잘라 각각 다른 곳에 파묻어 달라고 말한 다음 자살해 죽는 것으로 끝이 난 것이다.

그것이 불과 6년 전.

그 후 3년만에 그의 아들 범문(梵文)이 고달산(高達山)의 산적 수신(壽神)과 함께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곧 진압된 것까지 합친다면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온 나라는 바로 이러한 귀족세력들이 저지른 불길과 일으킨 반란으로 어지럽기 짝이 없었던 것이었다.

실제로 처참한 비극의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은 흥덕대왕과 김충공은 무엇보다 낡은 세력들인 중앙귀족들을 개혁하지 않고는 국가의 장래가 어둡다는 생각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대왕마마."

흥덕대왕이 술잔을 내리면서 계속 그 뜻을 묻자 마지못해 김충공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대왕마마의 속마음을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나이까. 이제 대왕마마께오서 장보고를 왕경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멀리 있는 물(遠水)'을 끌어들이기 위함이 아니시나이까. 가까이 있는 불을 끄기 위해서라면 마땅히 물(水)이 있어야 함인데 가까이에는 그 어디에도 물이 없고 오직 타오르는 불만이 있사오니 먼 곳에 있는 물이라도 끌어들여 불을 끄시려 함이 아니시나이까."

김충공의 표현은 정확하였다.

썩어빠진 신라의 조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물이 필요함인데 김충공의 표현대로 중앙의 귀족세력 그 어디에도 그 불을 끌만한 물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보고는 타오른 불을 끌 수 있는 유일한 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장보고는 흥덕대왕과 김충공이 선택한 '멀리 있는 물', 즉 방화수(防火水)였던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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