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異說-테러 이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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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경제학 고수(高手)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오늘은 직관에 좀 기대야겠다. 미 테러 참사 이후 세계 경제가 더 어려워지고 경기회복이 늦어질 것이라는 일반적 예측과는 좀 다른 소리를 해야겠기 때문이다.

우선, 경기회복이 늦어진다고?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다. 오히려 경기회복이 앞당겨질 수도 있다.

*** 경제회복 앞당길 요인들도

경기회복이 늦어지리라는 판단은 미국 경제를 그나마 지탱해오던 소비가 더 움츠러들 것이라는 예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민간소비는 그렇다 치고, 정부 지출은□ 또 금리인하 등 각국의 수요진작책은?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신속하게 0.5%포인트씩 금리를 내렸다. 테러사태가 없었다면 이처럼 과감한 정책 공조는 있을 수 없었다.

미국 정부는 4백억달러의 재해 복구비를 책정했다. 이에 대한 여야의 논란도 없었다. 더하여 폴 크루그먼(미 프린스턴대학 교수)같은 고수는 연일 뉴욕타임스에 '악에 받친 듯' 글을 써대고 있다. 정부 지출을 훨씬 더 늘리라고. 그것도 당장.

요컨대 이미 하강기에 들어서있던 세계경제에 이번 테러는 정책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인플레가 무서워 금리를 찔끔찔끔 내리고 돈도 선뜻 못 풀던 각국 정부가 이제는 '테러 이후' 를 더 무서워하니까. 결국 경기하강의 골은 당장 더 깊어지고 그 속도는 더 빨라지겠지만 경기회복은 되레 앞당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 물가가 오를 것이라고?

노. 당장 유가를 보라. 떨어지고 있잖은가. 소비가 줄면 물가는 내려가게 돼 있는 데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도 테러사태 직후 "유가안정에 노력하겠다" 고 발표했다.

미 테러참사라는 재앙보다 더 큰 대재앙은 곧 '테러사태의 확산' 이라는 사실을 온 세상 모든 나라가 직시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인 야세르 아라파트가 헌혈 장면을 온 세계에 보여준 것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간 분쟁이 조용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다 지금의 세계경제 침체는 공급과잉 요인이 크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2차 세계대전과는 완연히 다를 이번 '테러대전' 이 공급과잉을 해소하지는 못할 것이다.

대신 소비가 줄면서 공급과잉 업종이 '바닥' 을 더 빨리 볼 것이고 이 또한 경기 회복을 앞당길 수 있다.

물론 바닥을 보는 일은 당장 고통스럽고 여기에는 예컨대 한국의 하이닉스냐, 미국의 마이크론이냐는 식의 치열한 생존게임이 수반될 것이지만.

한편, 테러사태의 후폭풍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보험.항공.해운.관광 등 부가가치 비중이 큰 업종들이 직격탄을 맞았고 주가는 어느 때보다도 큰 진폭(振幅)을 그리면서 대세 하락기에 들어섰다.

언제 이 대세가 바뀔까. 신(新)질서의 윤곽이 잡힐 때가 될 것이다.

냉전 종식 이후의 새 질서, 미국의 독주에 대한 새 질서, 일방적 세계화에 대한 새 질서 등등이 반(反)테러에 대한 새 질서와 함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할 것으로 기대한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승기(勝機)를 잡은 계기가 되었던 미드웨이 해전(1942년 6월 4일)이 대공황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은 변곡점이었다는 견해가 있는 것처럼, 이번 테러대전의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새질서의 출현 가능성이야말로 새로운 역사의 변곡점이 될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 '새 질서' 보이면 대세 전환

서방은 이슬람을 적으로 만들지 말아야 하고, 미국의 보복은 테러집단에 2차 테러 또는 생화학 테러를 감행할 명분을 주지 않도록 신중해야 하며, 중동의 화약고는 누구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3차 세계대전에 대한 공포와 그를 막으려는 인간의 이성을 믿는 편이 '증시는 오늘도 심리적 공황' 이라는 보고서를 보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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