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자율 "해라" 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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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각종 협회장 선임은 정부가 임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국민의 정부' 가 들어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기업 구조조정.공기업 사장추천제.은행 금리자유화.대학운영 자율 등 각 분야에 걸쳐 자율체제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은 민주화 시대에 걸맞은 일이며 '국민의 정부' 다운 시책이라 할 수 있다.

*** 정부지시 왜 안없어지나

그런데 겉은 자율인데 속은 타율인 현상이 도처에서 나타난다. 소위 빅딜(현대전자/LG전자, 대우차/삼성차)에서 보듯이 돈 없는 기업이 돈 많은 기업을 인수하게 한 일이 그렇고, 부채를 줄이기는커녕 계열사간 '뺑뺑이 증자' 로 숫자 맞추기 놀이로 끝난 부채비율 2백% 강제가 그렇다.

대학운영의 자율은 교육부의 지침 범위 안에서의 자율에 지나지 않는다. 신입생 모집은 이런 식으로 하고 학생 정원을 비롯한 학교운영은 저런 식으로 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자율 "해라" 고 한다.

공기업 사장은 사장추천위원회에서 추천하도록 돼 있다. 대통령도 장관이 인사에 간여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난 3월에 있었던 담배인삼공사 사장 인선에서는 완전 자율로 추천된 사람이 선임되는 놀라운 일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런 기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사외이사와 민간위원으로 구성된 사장추천위원회는 사장 후보를 복수 또는 3배수로 추천한다.

민간위원도 정부의 입김에 의해 위촉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3배수 추천 후보 중 한 사람은 정부 의중에 있는 인물이게 마련이다. 그 사람이 최종 결정되는 것은 뻔한 순리다. 형식은 자율인데 결과는 타율이다. 그래서 노조가 낙하산 인사라고 떠들고, 이를 기화로 구조조정에 반대한다. 이래서 공공부문의 개혁이 안되는 것이다.

금융계도 대동소이하다. 금리가 자율화됐다고 하지만 창구지도로 올리라면 올리고 내리라면 내려야 한다. 그래선지 은행장 자리가 인기없는 자리로 둔갑했다고 한다. 누가 되더라도 부실채권이 많아 정부에 의지하지 않으면 지탱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속인수채권을 은행 '자율' (□)로 받지 않을 수 없다. 자율 경영이 가능한 제일은행의 호리에 행장이 금융계 인사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부는 언론개혁을 명분으로 세무조사라는 칼과 신문고시라는 회초리를 들었다. 자율개혁이 잘 안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언론계도 반성할 점은 있다. 발행부수를 투명하게 알 수 있게 하는 ABC 제도의 시행은 광고주가 광고효과를 알 수 있게 하는 요체다.

그에 따라 광고료를 합리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시장원리에도 맞다. 또한 무분별한 무가지(無價紙)배포는 신문강매와 아파트 현관 앞의 무더기 방기(放棄)로 독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신문구독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를 괴롭히는 과잉판촉을 그만둘 결심이라면 공동지국의 운영으로 배달 경비를 줄여 광고료 수입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 신문사 경영의 정도일 것이다.

*** 회초리도 목적 순수해야

그러나 정부의 의도가 언론 길들이기, 말문 닫기, 중.조.동 영향력 줄이기, 내년 대선 대책 등에 있다는 항간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무리 잘 드는 칼과 좋은 회초리라도 이 빠진 도끼나 파리채가 되고 말 것이다. 목적이 순수하고 행동이 바르면 독자들은 정부편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번 신문고시는 신문협회의 자율규제를 강제하고 있다. 이것은 자율이 아니라 자율 "해라" 다. "해라" 하는 자율은 자율일 수 없다. '자율' 이라는 멋진 모자를 씌워놓고 "해라" 하고 주먹질을 하는 격이다. 공정거래위원장의 임의개입 발언을 보면 아무래도 주먹에 무게가 더 실린 것 같다.

시장경제란 각자가 자기 의사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전제되는 시스템이다. 시장이 활발한 곳에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이고 우수한 두뇌들이 집결한다.

여기서 자유경쟁이 생기고 발명이 있고 창의력이 생겨 문명이 꽃핀다. 그 원동력은 사람의 자율적 사고에서 나온다. 자율사회가 곧 선진국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자율 "해라" 하는 시대에 머물고 있다. 정부가 마음을 비워야 참다운 자율의 시대가 올 것이다.

박종규 <행정개혁시민연합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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