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명의 無로 바라보기] "나 빚 받으러 왔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는 노랫말의 유행가가 있다. 한 방송사에 의하면 "다시 태어나도 지금 배우자를 택하겠느냐" 는 질문을 던진 조사가 있었단다. 남편은 7할이 부인은 3할만 "그렇다" 고 대답했다. 10명의 부인 중 7명이 현재의 남편을 버리고 다른 이를 찾아 결혼하겠다고 답한 것이다.

사실 이 조사의 단순한 질문으로는 부부의 진짜 속마음을 끌어낼 수 없다. 자식을 낳고 일생을 같이 산 의리의 측면에서는, 내생에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다른 배우자를 선택하겠다는 대답은 자신을 고생시킨 상대에게 살짝 투정하는 것이거나 상대에 대한 굳은 믿음 위에 애교나 응석조로 까불어 보는 것에 불과하다.

또 내생이 완전히 다른 무대라고 생각하면 현재의 배우자에게 묶이고 싶어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여행을 할 때 가능하면 못 가본 곳을 찾으려고 한다. 연기를 하더라도 이전과 성격이 다른 역을 맡아 자신을 다양하게 표현하려는 의욕을 갖게 마련이다.

조사 응답자가 의리를 염두에 두느냐, 아니면 내생을 무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무대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대답이 달라질 것이므로 형식적인 답만으로 그 속마음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선 다해 아끼고 보살펴야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를 강조한다. 금생은 전생에 내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업을 반사하는 거울이다. 내생의 내 모습을 미리 보려면 지금 내가 짓는 업을 살피면 된다. 남에게 꽃이나 아름다운 마음을 많이 보시하면, 미모를 갖고 태어난다.

남을 살려주는 일을 많이 하면 훌륭한 자식을 얻는다. 산이나 집에 불을 지르면 미친 사람으로 태어나 정신없이 헤매다 죽게 된다. 생업이 아닌 재미로 살아 있는 동물의 새끼를 잡거나 죽이면 골육이 분산돼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모든 일에 인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원인이 어떤 구체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중생인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내 배우자는 나와 관련이 있고, 나는 내 몸가짐 마음가짐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동물학자들은 사람을 포함해 모든 동물이 처음부터 현재의 모습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환경과 어우러져서 진화.퇴화, 또는 변형돼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업에 의해 나의 정신적.육체적 모습과 나의 배우자가 바뀌어진다고 할 수 있다.

*** 내생에서도 만나는 배우자

1999년에 탄생된 우리나라의 제1호 복제소 '영롱이' 가 자연교배를 통해 새끼를 낳았다. 그런데 그 복제소는 그 모체가 되는 소의 작은 체세포만으로 만들어졌다. 우리의 피 한방울, 살 한점에 나에 관한 모든 정보가 담겨 있고 그것만으로 똑같은 나의 복사품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그 나는 혼자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종류의 환경, 특히 배우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의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내 체세포에 나의 모든 것이 담겨 있듯이 내 속에 이미 내 배우자까지도 담겨 있지 않을까. 단지 육체적인 의미에서의 유전자만이 아니라 업을 적용한 정신적인 의미에서 나와 환경이 포함된 유전자도 생각해볼 수 있다는 말이다.

보통 인간에게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배우자에게 장점이 많고 나에게 잘 해주더라도 단점이 보이게 마련이다. 상대가 건강.미모.돈.권력.명예 등을 다 갖추고 나를 왕자나 공주처럼 모셔주더라도 고루함이나 지루함을 피할 수 없다.

다이아몬드와 금이 아무리 찬란하더라도 그속에만 묻혀 살면 시력을 상한다. 더욱이 평범한 배우자는 소설이나 꿈속의 왕자.공주가 아니다. 지금처럼 경기가 나쁠 때는 자식 공부시키며 먹고 살 일을 걱정해야 하는 약한 인간이다.

짝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그는 내가 다겁생에 지은 빚을 받으러 온 채권자이다. 금생에도 내생에도 그를 피할 수가 없다. 내생에는 다른 이름과 얼굴을 갖고 나에게 올 것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위하고 보살펴서 빚을 갚을 수밖에 없다. 내생에 상대와 헤어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금생에 빚을 다 갚아 버려라. 더욱 아끼고 사랑하라. 친절을 원하는 모든 이에게 나는 채무자임을 명심하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