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기획 시론

4. '남해안 관광벨트'가 대안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수도 이전 위헌 결정 이후 침묵하던 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는 한편, 국토 균형발전과 수도권 과밀 해소라는 정책목표는 계속 추진할 의사를 강하게 천명했다. 이제 수도 이전을 정책수단의 목록에서 제외한 상태에서 국토 균형발전과 수도권 과밀 해소 정책이 본격 논의될 모양이다. 이 시점에서 할 말이 없어야 하는 이들이 적지 않겠으나, 오히려 할 말이 많은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균형개발의 원론으로 돌아가 딱 한 가지만 제안하고자 한다.

이론적으로 서울과 수도권의 과밀을 해소하고 균형발전을 이룰 수 있는 대응축(counter-pole)이나 거점은 과밀의 중심으로부터 가장 멀고 낙후한 곳에서 찾아야 한다. 정부가 밑그림을 그려 보인 후 방아쇠만 당기면 민간이 달려들어 할 수 있는 사업이어야 한다. 재정에 의존해서는 생명력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미래지향적 생산활동과 연계돼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에 더해 다른 국정과제의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대부분의 구조적 낙후지역에서는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없다. 그래서 낙후지역에 대응축이나 거점을 마련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에게 그 도깨비방망이 같은 길이 하나 남아 있다. 한려수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해안 국제 관광벨트 개발'이 그것이다. 단언컨대 우리나라 남해안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이다. 온화한 기후에 보석 같은 섬들과 리아스식 해안이 빚어내는 절묘한 풍광은 그야말로 천혜의 걸작이다. 더구나 거기에 오랜 삶의 역사를 토대로 토속적인 문화예술이 피어났다. 이런 '바다의 땅'이 지금까지 원형에 가깝게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다. 그동안 차이고 밀리면서 때로는 잊힌 채로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지역 주민들에게는 미안한 말이나 나라를 위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남해안 지역은 전남-경남에 걸친 서울에서 가장 멀고 가장 낙후한 지역이다. 국제관광휴양지로서 최적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고,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의 관광시장이 충분한 수요를 형성하고 있다. 계획만 잘 세우고 제도만 보완하면 정부는 기본 인프라 투자 외에 큰 재정적 부담을 안 해도 된다.

지난 몇년 사이 국내외 관련 민간 기업 가운데 동아시아 관광 투자를 물색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고, 그중 일부는 사업에 착수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부의 확고한 의지가 담긴 계획뿐이다. 지금 반도체와 휴대전화.자동차가 우리를 벌어 먹이지만 한 세대 후에는 관광이 또 한몫을 해낼 것이다. 지금 수출호황을 누리는 산업들이 성공한 것은 미리 앞을 내다보고 투자를 결정한 기업과 이를 뒷받침한 정책의 공이다.

부산항.광양항이 동북아의 허브로 발돋움하려면 배후 관광휴양벨트는 필수다. 건설경기는 말할 것도 없고 고용창출에도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 관광벨트를 타고 사람.물자, 정보와 프로그램이 긴밀하고 복잡한 네트워크를 형성해 움직이게 되면 영호남 화합은 하지 말라 해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면 서울.수도권에 대한 대응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현 시기에 통일을 빼고 이보다 더 파급효과가 크고 긴요한 사업은 없다. 대륙의 끝이라고 유배나 보내던 곳이 반도를 이끄는 머리가 되는 것이다.

이 제안은 중앙일보에서 주최했던 수도이전국민대토론회에 내놓았다가 "수도 이전을 전제하지 않았다"고 퇴짜를 맞은 적이 있다. 혹여 수도 이전에 반대했던 사람의 글이라고 눈을 가리고 귀를 막지 말기 바란다. 반대가 나라를 위한 것이었듯이 제안도 역시 나라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우익 서울대 교수.지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