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정치 手읽기] 민심 담아낼 名局 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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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조건 없는 국회 등원' 이라는 파격에 가까운 신수(新手)를 들고 나왔다. '젊은 피' 로 일컬어지는 신예들조차 케케묵은 수법에 쉽게 동화되고 마는 우리 정치판에서 李총재가 던진 신수는 신선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다.

신수는 본래 상대에 대한 자신감과 여유의 표현이기도 하다. 가뜩이나 어려움을 겪던 민주당은 탄핵안 파동으로 모양이 크게 무너진 채 거의 주저앉은 상황이었다.

'소수여당의 비애' 를 곱씹으며 다음 수를 찾지 못하던 민주당과 정부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형국이었다.

바로 이 장면에서 李총재는 날카로운 창(槍)을 거두고 썰물처럼 물러서더니 오랫동안 궤짝 속에 넣어두었던 '민생' 이란 깃발을 높이 내걸었다. 간명하고 빠른 행마였다.

더 밀어붙이면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 몰라도 함께 피를 흘리고 만다. 그보다는 퇴로를 열어주고 이득을 수습하는 것이 병법(兵法)에도 부합한다. 무엇보다도 경제위기를 방치하는 정치권에 대한 노여움이 민주당을 타고 넘어 한나라당을 덮칠 가능성이 있다. 2년 후의 대사를 내다본다면 지금은 벌어둔 실리를 관리하며 형세를 관망할 때라고 본 것이다.

金대통령은 고심의 장고(長考)를 거듭해왔다. 위기는 정치 쪽이 아니라 경제라고 하는 거대한 세력이 백지장처럼 엷어지면서 비롯됐다.

경제가 그런대로 두터울 때는 남북화해는 대세의 유연한 흐름이자 감동이었고 노벨평화상은 金대통령과 정부의 앞길을 비추는 근사한 등불이었다. 크고 작은 실수들이 종종 사태를 꼬이게 했지만 대세와는 무관해 보였다.

그러나 경제가 엷어지자 통일과 같은 잠재적 가치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일순에 빛을 잃었으며 그 틈을 비집고 "민주당은 조선노동당 2중대" 같은 돌출 발언과 '황장엽 파문' 이 송곳처럼 비어져 나왔다.

'구조조정' 과 '사정(司正)' 은 바둑의 패(覇)와 같아서 무언가 얻기 위해선 무언가를 반드시 내줘야 한다. 언젠가는 만패불청(萬覇不請)하는 결단을 내려야만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양대 노총은 사석(捨石)임을 거부하며 겨울 투쟁에 나서고 있고 농민들마저 판을 휘저을 듯 가세하고 있다. 금융사고는 계속 터지고 관료들은 침묵에 잠겨 있다.

金대통령이 이처럼 외로워졌을 때 李총재가 포위망을 푼 것은 '상생(相生)' 으로 가는 최선의 타이밍이었다. 이제 두 분은 서로 만나려 한다.

金대통령은 李총재의 신수에 어떤 쇄신책으로 화답할까. 또 李총재의 흉중(胸中)에 담긴 '민생' 에의 감각은 어떤 모습일까. 경제위기와 차기 대권은 미묘하게 얽혀있는 인상이다.

세상 모든 분야에서 전방위적인 밥그릇 전쟁이 불붙고 있어 보통 목소리가 크지 않고서는 축에 끼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이 판국에 정치권이 벌써부터 대권 욕심을 드러내면 다른 싸움꾼들은 저절로 면책특권을 얻게 된다.

석심(石心), 또는 석음(石音)이라고 한다. 바둑돌은 판 위에 놓이는 순간 생명을 얻어 끊임없이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바둑의 진정한 고수는 스스로의 고정관념과 독선을 두려워하여 고개 숙여 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귀를 낮춰 돌의 소리를 듣는다.

당파적 인사들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절박한 마음과 소망에 두 분이 좀더 가까이 다가간다면 수준 높은 신수가 또 다시 등장할지 모른다.

박치문 <바둑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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