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12년만의 장편 '오래된 정원'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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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소설가 황석영(57)씨가 '무기의 그늘' 이후 12년만에 새로운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창작과비평사)을 내놓았다.

대하소설 '장길산' , 단편 '삼포가는 길' 등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아왔던 황씨는 1989년 북한의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초청을 받아 몰래 북한을 찾은 이후 10여년간 창작활동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방북 후 미국.독일 등에서 사실상 망명생활을 하다가 93년 자진귀국, 5년간 감방생활을 거쳐 98년 석방된 뒤 새로운 글쓰기에 몰입해왔다.

그 첫 성과물이 이번에 내놓은 '오래된 정원' 이다. 책속에는 지난 10여년간의 경험, 특히 옥중체험과 직접 지켜본 동서독 통일과 사회주의권의 붕괴과정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89년 방북후 독일 베를린의 윤이상선생 댁에 머물던 당시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봤습니다. 20세기의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죠. 우리나라의 80년대, 열병처럼 지나간 일들이 생각나더군요. 80년대를 살아온 이들의 상처를 위로하는 진혼곡(鎭魂曲)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

80년대를 광주에서 시작해 베를린 장벽 앞에서 마감한 작가로서 80년대를 위한 기록을 남겨두고 싶었다는 것이다.

황씨가 오랜 생각끝에 만든 제목 '오래된 정원' 은 80년대 사람들의 유토피아를 상징한다. 주인공은 민주화운동 중 만난 남녀. 도피중이던 남자가 은신처를 제공해준 여자와 짧은 사랑을 나눈 '갈뫼' 라는 시골마을이 유토피아다.

남자는 18년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옥한 뒤 여자가 암으로 숨진 사실을 뒤늦게 안다. 이후 남자가 갈뫼라는 유토피아를 찾아가 여자의 행적을 더듬어 찾아가는 과정이 이야기의 줄거리다.

주목할 점은 80년대의 척박한 현실을 얘기하면서도 이야기의 중심은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과거 황씨의 소설이 부랑아.창녀와 같은 사회빈민층의 현실을 비추는 사회성을 앞세웠던 것과는 다르다.

이번 소설에서는 짧고 깊은 사랑과 오랜 헤어짐.그리움을 편지.일기.비망록 등 다양한 형식을 동원해 진하게 반복한다. 마지막에 여자가 남긴 자신의 아이를 찾아가는 대목은 특히 눈물샘을 자극하는 대목이다.

황씨는 석방된 이후 "이제부터는 진짜 야술(예술)한다" 고 말하곤 했다. 민주.민중의 이데올로기에 짓눌려 일부러 자제해온 본격적이고 순수문학적인 글쓰기를 하겠다는 다짐을 처음으로 실천한 셈이다.

황씨는 책을 내놓던 날 "80년대를 경험한 사람들을 위해 썼는데, 그들이 이제는 책을 잘 안보더라구. 그렇다고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긴 글을 읽을만한 참을성이 있을까" 라며 일말의 불안감을 내비췄다. 황씨는 여전히 활달하고 글 역시 힘을 잃지않고 있지만 1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야 하는 현실은 적잖이 벅차 보인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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