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언 리스트' 드러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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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신동아그룹 로비스트로 알려진 박시언(朴時彦)신동아건설 고문이 29일 검찰에 출두함으로써 보고서 유출 수사가 본격화했다.

검찰이 朴씨를 먼저 소환한 것을 보면 朴씨로부터 일단 충분한 증거를 확보한 뒤 이를 바탕으로 김태정(金泰政) 전 검찰총장과 박주선(朴柱宣) 전 법무비서관의 사법처리 수위를 속전속결로 결정하겠다는 뜻인 것 같다.

검찰은 朴씨에 대한 조사 초점이 보고서 유출 과정에 맞춰져 있다고 강조했다. 이종왕(李鍾旺) 대검 수사기획관은 "전선(戰線)을 넓히면 수사효율이 떨어진다" 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신동아의 총체적 로비실태를 수사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수사를 하다가 뭔가 포착되면 하는 것" 이라고 밝혀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보고서 유출 부분에 대해선 이미 상당한 내용이 공개된 상태다. 朴씨는 "金전총장의 집무실을 찾아갔다가 문건을 받은 뒤 비서실 여직원을 통해 복사했다" 고 밝혔고 金전총장의 변호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은 있다. 朴씨에 따르면 金전총장이 문건을 주면서 "밖에 나가서 읽어보라" 고 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그간 맺어온 인간관계나 문건의 중요성을 고려하면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그런 문건을 총장실 밖에서 비서들이 지켜보는데 읽어 보라는 게 이해가 안간다. 朴씨는 문건을 읽은 뒤 그걸 복사하고 다시 총장실로 들어갔다고 했다.

검찰총장이 손님을 맞는 일반 행태와는 너무 동떨어진 주장이다. 게다가 문건이 金전총장의 자택에서 건네졌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따라서 검찰은 정확한 전달경위를 규명해야 한다.

朴씨가 1년 가까이 보고서 사본을 보관하다 공개한 배경도 의문 투성이다. 그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라고 말하고 있지만 도대체 무엇에 대한 진실을 밝힌다는 것인지 모호하다. 그는 金전총장과 朴전비서관을 빗대어 "검찰과 청와대가 신동아 사건을 왜곡했다" 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朴씨의 보고서 공개 과정이 결국 이형자(李馨子)씨측을 고려한 게 아니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보고서보다 더 관심을 끄는 건 朴씨가 벌인 로비의 행태다. 옷 로비 의혹 사건도 따지고 보면 신동아측이 광범하게 시도했던 전방위 로비의 한 갈래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朴씨는 스스로 "金전총장과 朴전비서관.박지원(朴智元) 전 청와대 공보수석 등을 만났다" 고 말했다. 그는 "선처를 부탁했을 뿐 금품로비는 없었다" 고 강조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부인 이희호(李姬鎬)여사조차 신동아측으로부터 로비 시도가 있었다고 공개했다.

金전총장도 "여러 군데서 거절하기 어려운 로비 시도가 있었다" 고 말한 바 있다. 검찰총장이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을 할 정도의 직위에 있는 인사는 국내에 그리 많지 않다. 그런 부탁을 단지 신동아측의 선처 요구에 따라 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공교롭게도 朴씨가 신동아그룹 부회장으로 영입된 한달 뒤 검찰의 신동아 외화 밀반출 수사는 보류됐다.

검찰은 朴씨로부터 유출된 문건이 신동아측에 건네져 증거 인멸용으로 이용됐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에 따른 사법처리 여부도 검토하고 있는 상태다. 朴씨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자칫 '판도라 상자' 의 뚜껑을 여는 격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김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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