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병원과 노조와 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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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상향 (理想鄕) 이라고 하는 '유토피아' 의 본래 뜻은 '아무 데도 없는 나라' 다.

곧 이상적이라 할 수 있는 곳은 지구상에는 아무 데도 없다는 뜻이다.

한데 병원만은 예외다.

세계의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병원이 딱 한 군데 있었다.

13세기 말 지금 이집트 카이로의 알만수르 병원이 위치하고 있는 곳에 세워졌던 병원이다.

이 병원은 어떤 중환자라도 쾌적하고 안락한 분위기 속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었다.

환자는 왕이었고, 모든 것은 환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의사와 간호사는 물론 악사와 이야기꾼들까지 24시간 대기하면서 환자들의

원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잠 못 이루는 환자들에게 노래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환자가 완쾌해 퇴원하게 되면 다시 일에 얽매여 병이 재발하는 일이 없도록 일정기간의 생활비까지 보조해 주었다고 한다.

이 병원은 동양의학에서 말하는 인술 (仁術) 을 펼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것은 바로 의성 (醫聖)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을 따른 것이었다.

환자는 인술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병원은 그 권리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있음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그러나 이 병원이 오래 존속할 수 없었던 것을 보면 '이상적인 병원' 역시 존재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말이야 그럴 듯 하지만 '환자의 권리' 란 예나 이제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나라가 특히 그렇다.

가령 "수술.진료로 인한 어떤 후유증이나 합병증에도 병원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 는 환자측 동의서를 보면 병원 쪽의 이기주의만 강조돼 있을 뿐 환자의 권리는 찾아볼 길이 없다.

지난 96년 1월 공정거래위원회는 환자의 권리를 보완한 병원협회의 '표준약관' 을 승인한 일이 있지만 그 이후 3년 넘는 기간에 그 권리는 과연 얼마나 더 강해졌을까.

의사들의 인술 부재와 병원들의 이기주의에 대한 환자들의 불만이 좀처럼 가실줄 모르는 가운데 이번에는 34개 병원 노조가 연쇄파업에 들어간다고 해 비상이 걸렸다.

환자 없는 병원이 있을 수 없고 보면 이건 분명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 이 아니라 '새우들의 싸움에 고래 등이 터지는 격' 이라고나 할까.

파업의 원인이야 어떻든 이래저래 골탕을 먹는 건 환자들 뿐인데 이런 상황에서 환자들이 '권리' 를 부르짖어 봤댔자 '공허한 메아리' 일 수밖에 없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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