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엔약세 '한국만 불난 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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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근 계속되고 있는 엔화약세 추세에 대한 한국반응을 보면 우리의 냄비체질이 떠오른다.

국제금융시장 전문가들도 이번 엔약세를 그리 심각하게 보지 않는데 우리만 '수출비상' 이니 '경기회복에 찬물' 이니 야단이어서 하는 말이다.

최근의 엔약세의 본질은 의도적이라기보다 일본의 금융완화조치에 따라 파생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경기회복을 위해 금리를 잡으려다보니 엔화가 약세를 보인 것이지 정책노선 자체가 엔약세로 돌아선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특히 엔화가 달러당 1백30엔 밑으로 밀리면 중국의 위안화 평가절하 우려는 물론 미국도 무역적자 때문에 엔약세를 방관하기 어렵다.

일본의 사정도 장기간 엔약세를 밀어붙일수 없다. 금리는 더이상 내릴수 없는 한계에 부딪혀있고, 엔약세와 저금리를 피해 일본 국내자본이 해외로 대거 빠져나갈 경우 금융불안을 부채질할 우려가 높다.

엔강세가 도를 치나칠 기미를 보이자 사카기바라 에이스케대장성 재무관이 "오히려 여름쯤이면 엔강세가 문제될 것" 이라고 진화에 나선 것도 이때문이다.

지난해 10월 이후의 급속한 엔강세 과정에서 헤지펀드와 일본 기관투자가들의 움직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환투기에 나선 헤지펀드들은 수십억달러의 손실을 입은 반면 일본의 기관투자가들은 필요한 만큼만 외환시장에 개입해 시장을 떠받쳤다.

최근 엔약세 국면에서 헤지펀드들의 움직임이 느려진 것도 지난해말 환투기 실패의 쓰라린 경험 때문이다.

엔약세에 요란법석 떨면 필경 지난해말 꼴이 날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 금융시장이 불안정할수록 기관투자가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데도 요즘 도쿄 금융가에서는 한국 기관투자가들이 주식을 집중매도하고 달러매집에 나서고 있다.

엔화추세를 주의깊에 지켜보고 대비하는 것을 나무랄 사람은 없다. 그러나 본질을 모르고 널뛰듯 호들갑 떠는 것도 국가경제를 위해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이철호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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