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현실탈출 '유머 전성시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대기업 연구원인 金모 (32) 씨는 요즘 PC통신 채팅에 열심이다.

신세대의 대화와 유머를 익히기 위해서다.

또 매일 밤마다 유머집도 읽는다.

金씨가 이렇게 '유머 익히기' 에 노력하는 것은 선볼 때마다 '퇴짜' 맞는 이유가 바로 유머 감각이 부족한 탓이라고 판단했기 때문. 명문 Y대출신, 전자회사 연구원, 1백75㎝의 키, 귀공자풍의 외모, 중류층 가정. 통상적인 '결혼조건' 이야 나무랄데 없었지만 '매너는 좋은데 재미가 없다' 며 여성들이 퇴짜를 놓는데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 '대우' 받는 이상 (異常)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결혼.미팅전문업체인 듀비스가 최근 미혼 남녀 3백명을 대상으로 배우자 선정조건을 조사한 결과 '유머있는 사람' 이 29%를 차지해 능력 (19%) , 외모 (13%) 를 체치고 1위에 올랐다.

최근까지 능력.외모가 1.2위를 다투던 것과 비교해 볼때 크게 달라진 셈. 듀비스의 임수열 (林秀烈) 실장은 "최근 어두운 이야기들만 언론에 오르내리는 등 무거운 분위기에 실증을 느낀 젊은이들이 밝고 즐거운 얘기를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 말했다.

중소기업 회사원 김지원 (金知元.23) 씨는 모임이나 미팅때마다 재미있다고 소문난 친구를 데리고 간다.

"가장 친한 이는 따로 있지만 이 친구를 데려가면 모임의 분위기도 좋아지고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거든요. " 金씨의 변 (辯) 이다.

인기 스타를 바라보는 시각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

삼성에버랜드가 최근 임직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데이트를 하고 싶은 남성 연예인 1.3위에 개그맨 김국진.김진수씨가 뽑혔다.

반면 인기영화배우 한석규씨는 2위, 야구스타 박찬호씨는 4위에 머물렀다.

에버랜드의 심선화 (沈善和.30) 씨는 "김국진씨 같은 사람은 재미있게 해주고 편안하게 해줄 것 같지만 잘생긴 사람들은 너무 부담스러워 맘놓고 즐겁게 놀 수 없을 것같다" 고 말했다.

유머 소재를 찾아 나서는 노력들도 대단하다.

지난해 3월 PC통신작가 5명이 나우누리에 개설한 유머동호회 '유머가 가득한 작은촌 (유가촌)' 에는 하루 평균 2천여명이 찾을 정도. 회원가입신청도 지난해 하루 1~2명에서 요즘엔 8~9명으로 부쩍 늘었다.

이런 와중에 개그작가들이 사회강사로 인기를 끌고 있다.

개그작가 전영호씨가 지난4~5월 중앙문화센터에 개설했던 어린이 대상 유머교실은 늘 개구장이들로 만원사례. 전씨는 요즘 이곳저곳에서 주최하는 주부.어린이를 대상 유머강좌에 나서느라 눈코뜰 새 없이 바쁘다.

전씨는 "유머를 배우면 단순히 인기를 끌 뿐만 아니라 성격 자체도 활달해지고 자신감을 갖게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것" 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9일엔 개그작가 김재화 (金在和.46) 씨가 '웃음을 모르는 소맹 (笑盲) 은 문맹보다 더무섭다' 는 취지로 소맹퇴치운동본부를 발족했다.

金씨는 "웃음이 필요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웃음상담을 해주고 코미디강좌를 열고 있는데 반응이 의외로 좋다" 고 말했다.

광고계에서도 '복잡한 세상, 단순한 웃음' 의 유머광고가 득세하고 있다.

이 덕택 (?)에 이창명.이재포등 조연급 개그맨들은 요즘 한창 광고모델로 주가를 올리고 있다.

코미디 프로의 인기도 덩달아 상승세. 방송광고조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16.4%이던 코미디 프로 시청율이 지난 1월엔 18.3%로 껑충 뛰어올라 웃음을 그리워 하는 사람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유머는 직장에서도 중요한 조건으로 자리잡고 있다.

최근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입사원의 자기관리요령을 일러주는 책 '신입사원' 을 펴낸 전현대자동차 업무과장 조용문 (趙龍文.34) 씨 부부는 "밝은 표정으로 인사하는 습관을 들이고 재미있는 유머를 몇개 준비해두는 것이 입사초기에 필수조건" 이라고 지적할 정도다.

이런 현상에 대해 연세대 이훈구 (李勳求.심리학) 교수는 "사회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기 보다는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성격이 짙다" 면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심정을 솔직.담백하게 표현하는것이 이 난국을 이겨나가는 자세" 라고 말했다.

김창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