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우선순위 바로 세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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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현재 한국경제는 미국과 일본간의 운명을 건 전쟁의 십자포화 한가운데 있다.원치는 않았지만 우리도 불가피하게 말려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의 장래를 건 탈바꿈을 하고 있다.

전쟁은 크고 작은 수많은 전투로 이뤄지기 때문에 전략상 화력을 어느 전투에 집중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과제다.이번 아시아.유럽정상회의 (ASEM)에서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유럽의 주목을 받은 이유중 하나는 다른 아시아 지도자와 달리 서구의 보편적 가치를 주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서구에서는 우리를 '제2의 일본' 으로 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그런데 일본식 자본주의를 버리고 국제통화기금 (IMF) 의 처방, 즉 영.미식 시장경제를 포용하는 것에 박수를 보낸 것이다.

거기에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李光耀) 나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총리와는 달리 아시아적 고유가치보다 서구식 민주주의를 외치니까 금상첨화였던 것이다.이제 우리는 당면한 전쟁터에서 선택을 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개혁을 할 것인가.국민의 고통을 어루만질 것인가.김대중 대통령은 이 어려운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돈을 지금 고통경감 차원에서 써 버리면 미래의 일자리를 만들기 어려우니 참으시오" 라고 한다면 당연히 지방선거에서 표로 환산은 안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구조조정을 소홀히 하고 실업대책만 챙기면 대외신인도가 하락하고 외국인투자 유치가 어려워지며 이미 들어와 있는 투자도 빠져나갈 것이다.따라서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 인기 있는 메뉴를 택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인기 없는 정책이라도 나라의 장래를 위해 경제적 고려를 앞세울 것인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당장 일자리가 있고 먹을 것도 충분히 장만해 놓은 사람에게는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문제처럼 보인다.그러나 이제 걸음마단계의 고용보험이나 국민연금 같은 사회안전망이 정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1백30만명의 실직자 (영향받는 인구는 가족을 포함해 4백만~5백만명) 를 혼자 알아서 살라고 내칠 수 있는지 쉽게 말할 수는 없다.그러나 인기 없는 정책을 솔직하게 국민에게 내놓고 '피와 눈물과 땀' 을 요구할 수 있는 지도자야말로 참된 용기를 가진 지도자다.

위기상황의 정치력은 이런 어려운 결정을 하는 데서 나오는지도 모른다.정부 내부에서 빨리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부분은 사실 두 가지가 중첩돼 있다.

하나는 한정된 재원을 구조조정에 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실업대책에 쓸 것인가다.

또 하나는 실업대책으로 사회간접자본 (SOC) 과 같은 공공투자를 해서 이른바 뉴딜식 거시적 접근을 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유망한 수출중소기업의 고용흡수력을 늘려 실업을 예방하는 미시적 접근을 하느냐다.정부내에서 후자쪽으로 의견이 조율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

다만 어떤 선택을 해도 재원마련과 관련해 국민에게 솔직히 공개해야 한다.

'국민의 정부' 가 정책선택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면 '문민정부' 의 '신 (新) 경제 1백일계획' 을 타산지석 (他山之石) 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당시에도 개혁을 강하게 밀고 나가려면 우선 경기를 회복시켜야 한다며 루스벨트 운운하면서 경기부양책을 택했다.

요즘 신문지상에 등장하는 뉴딜정책 운운 기사에서 불길한 유사점을 발견하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가급적 정책의 우선순위는 먼저 재정과 국영기업 매각 및 외국인자금을 총동원해 금융기관의 부실을 정리하면서 유동성을 늘리고, 그 기반 위에서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재무구조 개선을 유도하는 데 둬야 한다.

기업의 구조조정은 단순히 차입금 축소나 사외이사.소액주주대표 소송과 같은 지엽적 문제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궁극적으로는 우리 기업이 물건을 팔아 돈을 벌 수 있게 하는 데 더 관심을 둬야 한다.따라서 이 점에서 효율성의 개혁도 말해야 하는데 요즘은 너무 한 측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대로 가면 개혁만 떠들다 경제의 복원력을 상실해 남미가 경험했듯이 '잃어버린 10년' 이 올지도 모르고 그러면 실업대책은 세울 수도 없게 된다.당장은 실업을 구제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솔직히 말하고 경쟁력을 갖추는 것만이 일자리를 늘리는 길이라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장현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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