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3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제2장 길위의 망아지 ⑦

"원양어선들이 잡아오는 명태들이오?" "사실 북양태를 명태라고 이름 붙여 주기에는 낯 간지러운 일이지. 명태에도 수다스러울 정도로 이름이 많소. 물기가 있는 것을 생태라 하고, 덕장에서 말린 것은 노랑태나 황태북어로 불러요. 그리고 대여섯 마리를 꿰어 약간 꾸덕꾸덕하게 말린 것은 코다리라 하고, 어선에서부터 냉동시켰다가 해동시킨 것은 동태요. 그런데 생태중에서도 낚시로 잡아올린 낚시태가 있고, 그물로 잡은 망태가 있소. 그래서 명태중에서도 누구돈 받을 줄 모르는 게 바로 낚시태요. 망태 값의 세 배나 되지만 없어서 못팔 지경이니까. " 덕장 근처의 허술한 민박집에 숙소를 정하고, 라면 세 봉지를 끓여 저녁끼니로 벌충한 다음, 온데 간데 없이 자취를 감추었던 변씨가 명태 한 마리를 달랑 들고 돌아왔다.

"이게 바로 북양태로 말린 코다리요. 노랑태는 크고 작은 것을 상관할 거 없어요. 좆도 모르는 것들이 덮어놓고 큰 것만 찾다보면, 십중팔구 북양태 코다리를 노랑태로 잘못 알고 사놓고선 진짜 노랑태를 샀다고 대중없이 떠들기 십상이야. 작아도 잘 익은 바나나처럼 노리끼리한 색깔인가 아닌가를 살펴봐야 돼. 이것처럼 껍질에 검은 빛이 도는 것은 애당초 거들떠볼 필요도 없어요. 선박에서부터 썩은 채로 하선한 놈이 아니면, 덕장에서 비를 맞혔거나 서로 붙은 것을 떼어주지 않아 통풍이 안된 것들이지. 강풍에 땅에 떨어진 것을 거두지 않아도 검은색이 돌게 마련이오. 원산명태는 12월부터 꾸덕꾸덕하게 건조시키기 시작해서 3월께나 가야 건조가 끝납니다.

꼬리를 부러뜨리면, 딱 소리를 내면서 부러지도록 모질게 말라야 진짜 노랑태요. 알겠소? 내일 덕장으로 나가서 구경해봅시다.

" "내일 구경보다 오늘 밤 떨고 잘 것이 당장 걱정이오. " "니기미, 욕지기가 저절로 터져 나오네. 이봐요, 이 한심한 한선생. 지금 엄살하는 거요, 투정하는 거요? 당신도 대학 졸업 해봤으면 알테지만, 대학 4년 졸업하면 뭐가돼요? 그게 학사라는 거지? 학사 위엔 석사지? 석사 다음엔 내로라 한다는 박사 아니오. 그런데 이 질정찮고 한심한 것들이 박사 학위 따고 나면, 세상이 온통 제것 된 줄 알아. 박사 위에 뭐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선불맞은 토끼 뛰듯이 갈팡질팡 까불어댄단 말이야. 그런데 박사 위에 있다는 게 다름아닌 장사요. 젠장, 이제 알아듣겠소? 하룻밤 냉골신세가 대순가? 소주 한 병 까먹고 누웠으면, 사명대사가 따로 없어. 나도 사명대사지. " 변씨는 바지주머니 속에서 권총이라도 뽑듯이 소주 한 병을 쑥 뽑아올렸다.

그리고 방구석에 뒹굴고 있던 헌 신문지 조각을 발뒤축으로 끌어당겨 그 위에 소주병을 내려 놓았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북양태 한 마리를 일같잖게 좌우로 북 찢어서 껍질을 벗겨내고 날렵한 솜씨로 육질을 도려내고 있는 모습을 한철규는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앉아 있었다.

구미가 당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주잔은 어디서 마련하는가 싶었다.

이빨로 병마개를 가차없이 물어뜯어 방구석까지 핑 소리를 내며 날아가 떨어지도록 내뱉은 뒤였다.

병마개가 굴러가서 멈춘 방구석으로 엉금엉금 기어가서 장판 모서리를 찢어 들고 돌아왔다.

그것으로 깔때기를 만들어 한철규에게 건네주고 소주잔을 기울였다.

먼저 한 잔 하시오 라는 말과 함께 콧등으로 술냄새가 뭉클했다.

"아니 벌써 밖에서 한 잔 하신 것 같은데?" "냄새 맡는 데는 개코 저리 가라구만. 한선생 보시다시피 내 비록 쇠뿔에 떼밀린 놈처럼 비실비실 개차반으로 살고 있지만, 나라고 해서 가슴 속에서 뒹구는 비관이 없겠소? 그런데 이게 대낮에는 멀쩡하다가 해가 설핏해지고 나면, 불 붙은 보릿겨에서 나는 연기처럼 새록새록 도지는 병이오. 게다가 한선생과 주량을 맞추자면, 내 먼저 한 잔 빨아둬야 얼추 죽이 맞을 것 아니겠소. "

<김주영 대하소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