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무림]제3부 11.화룡점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만인전시기 (萬人電視機)가 무림지존을 만든다.' 무림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백만 백성을 여의섬에 모아놓고 황금을 마구 뿌려대던 시대는 지났다.

안방에서 강호 백성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실전과 다름없는 비무가 펼쳐졌다.

온갖 초식을 동원해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고 자신의 무공을 뽐내야 하는 만인전시기의 논검비무 (論劍比武 : 말로 무예를 견줌) 는 곧 진검 (眞劍) 승부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상처입는 자, 이를 치유하지 못할 것이며 여기서 승리하는 자, 곧 무림지존좌에 오를 것이었다.

만인전시기 논검비무 출전자는 회창객.대중검자.인제거사등 세사람. 이들 외에 무림노련 (勞聯) 의 총수 길영권 (吉影拳) 등 4명이 더 지존비무에 출사표를 던졌으나 그들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만인전시기 출연은 개인의 무공보다는 조직과 세력의 많고적음에 따라 결정됐기 때문이었다.

승부는 단 세차례. 대중검자는 더 젊어져야 했고 회창객은 더 부드러워져야 했으며 인제거사는 더 패기만만해야 했다.

싸움은 적아를 구별하기 어려운 혼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한사람의 약점을 두사람이 합공하기 일쑤며 똑같은 약점을 가진 자끼리는 서로 감싸주게 될 것이다.

회창객이 대중검자에게 황금남몰래숨겨두기추궁초식을 펼치면 인제거사가 가세하고 인제거사가 두아들살빼고군대안보내기초식으로 회창객을 공격하면 대중검자가 옳다꾸나하고 합공하리라. 그러나 은연중 대중검자와 인제거사의 회창객에 대한 합공이 더 많을 것이었다.

두사람 모두에게 회창객은 자신들의 무림지존좌 등극을 가로막는 눈엣가시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대중검자는 이이제이 (以李制李) 를 위해, 인제거사는 2위탈환을 위해. 15대 무림지존 비무대회는 그렇게 만인전시기의 혈투로 대장정의 막을 열었다.

"사할싸움입니다.

주군의 승리는 기정사실입니다.

인제거사와 회창객, 두사람 중 누구도 천하 세력의 사할을 거머쥘 수 없을 것입니다."

대중검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왼손에는 바람검이 들려 있었다.

40년 무림인생을 벗해 온 검이다.

대중검자에게 천하제일검이란 이름을 얻게 한 바로 그 검이다.

이제 곧 바람검은 또 다시 천하무림을 향해 그 웅대무비한 힘을 펼쳐야 할 것이었다.

상대는 회창객과 인제거사. 절치부심 평생을 연마해 온 바람검은 주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었다.

오른손에는 한지 한장. 대중검자는 이미 명경 (明鏡) 처럼 깨끗해진 바람검을 닦고 또 닦았다.

그런 대중검자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새국민회의 정세분석통으로 불리는 채정공의 말이 이어졌다.

"회창객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회창객의 한계입니다.

인제거사가 건재하는 한 그는 절대 주군의 세력을 추월하지 못합니다."

대중검자가 천천히 바람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근거는?"

"만인전시기입니다.

만인전시기의 논검비무는 인제거사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그는 지난 92년 지존비무때의 현대문주 정 (鄭) 노야와는 다릅니다.

정노야는 상벌 (商閥)에 대한 백성의 염증을 간과해 크게 무너졌지만 인제거사는 빈농 (貧農) 의 아들입니다.

게다가 젊고 패기만만하며 뛰어난 음공 (音功) 의 소유자입니다.

특히 그의 청룡사자후는 논검비무에선 천하제일의 무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회창객은 절대 인제거사의 세력을 이할 밑으로 끌어내리지 못할 것입니다."

"인제거사가 천하 세력의 이할 이상을 얻으면 나, 대중검자의 승리가 틀림없다는 얘기구려. 일할오푼 밑으로 떨어지면 회창객에게 지존좌를 내줄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사실 최근 회창객이 욱일승천의 기세를 보여 걱정하기도 했습니다만 이젠 마음놓으셔도 됩니다.

세차례의 만인전시기 논검비무가 회창객에게 대역전의 기회를 빼앗아 버릴테니까요. 주군께서는 그저 인제거사가 회창객을 공격할 때 조금 거들어주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다가 또 거꾸로 인제거사가 급속도로 세력을 늘리게 되면?"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천하무림의 판세란 그리 빠르게 움직여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 "수성객의 말마따나 아예 인제거사와 내가 합력하는 것은 어떻소?" "안됩니다.

말로는 노소동락이요, 여야합력이라지만 역효과만 낼 뿐입니다.

주군과 인제거사의 무공은 화탄 (火炭) 과 얼음처럼 서로 상극이라, 오히려 회창객에게 지존좌를 헌납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합력이라면 차라리 인제거사가 끝까지 지존비무에 참가하는 게 합력이 될 것입니다."

"맞는 말이오. 하기사 인제거사 그자, 결코 중도에 물러날 위인도 아니오. 내 은근히 사람을 보내 의중을 떠보았지만 아예 들은 체를 않습디다.

그나저나 그자가 회창객과 힘을 합할 가능성은 없겠소?" "이미 회창객과 인제거사는 불구대천지수 (不俱戴天之讐 : 함께 하늘아래 살수 없는 철천지 원수)가 된지 오래입니다.

조금도 심려 마십시오. " 대중검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채정공의 얘기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결전의 날이 가까워올수록 몇번씩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는 대중검자였다.

그런 대중검자의 기색을 눈치 챈 채정공이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무림경제가 파탄에 빠진 것도 어쩌면 주군의 지존좌 등극을 돕는 하늘의 뜻인 듯합니다.

주군께서야말로 대중경제공의 일인자시니까 말입니다."

"그것도 듣기 나쁜 말은 아니구려. " "그러니 다른 것은 다 잊고 주군께선 오로지 반로환동공 (返老還童功 : 늙은이가 어린애처럼 젊어지는 무공) 연마에만 전력을 기울이십시오. 재여무림에서 주군의 건강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소리들이 쏙 들어가게. 그게 바로 용의 눈에 눈알을 찍는 일입니다."

"이를 일러 화룡점정 (畵龍點睛) 이라 - .눈알이 그려진 용은 곧 승천하는 법이니 반로환동공이 바로 등룡 (騰龍) 의 비결이란 말이구려. 허허, 내 명심, 또 명심하리다."

"사할싸움입니다.

주군의 승리는 기정사실입니다.

이제 축배를 드는 일만 남았습니다."

상목소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회창객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요즘 들어 회창객의 입가에는 늘 미소가 붙어다녔다.

"대중검자의 세력은 사할이 한계입니다.

그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주군의 세력은 사할을 넘길 것입니다."

"근거는?" "인제거사의 몰락입니다.

대중검자와 그의 측근들은 정족지세가 필승지세라며 좋아하지만 천만의 말씀. 인제거사가 버텨주는 게 오히려 주군께 유리합니다.

재여무림의 반 (反) 대중검자 세력은 위기의식을 느껴야 한 곳으로 뭉칩니다.

양자대결이 되면 위기감이 떨어져 비무에 참가하지 않거나 뿔뿔이 흩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되면 역으로 주군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인제거사가 최후까지 버텨야 비무 당일 대중검자를 반대하는 세력이 모두 주군께 올 것입니다.

늘 그래왔듯이 재여무림의 모든 힘은 대중검자를 이길 수 있는 사람에게 집중되게 마련이니까요. 당연히 인제거사의 세력은 모의전투 때보다 훨씬 밑도는 일할대에 그치고 말겁니다.

지난 92년 비무때 재신 (財神) 정노야나 찬종검의 경우처럼. " "만인전시기 논검비무에 따라 상황이 바뀔 수도 있지 않겠소?

보나마나 대중검자와 인제거사가 합공을 해올테고. 한 주먹으로 두 주먹을 당하기 어려운 게 무림의 법칙 아니겠소?" "두사람의 합공이 많을수록 주군께 득이 됩니다.

백성들은 달리 생각할 겁니다.

주군이 얼마나 강하고 두려우면 두사람이 합공을 하겠냐며. 오히려 주군의 강맹함을 뽐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미 주군의 무공 약점에 대한 보완책이 다 마련됐습니다.

대중검자는 절대 안된다던 내각무림만들기에 앞장섰으니 일구이언이부지자초식으로, 인제거사는 경선불복물고늘어지기초식으로 상대하십시오. 덧붙여 간간이 여유웃음재치무공을 섞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렇다해도 대중검자와 인제거사는 녹녹지 않은 인물들,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려. " "대중검자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잖습니까?

무릇 무림지존 된 자는 천하의 누구보다 고강한 무공과 건강한 신체를 가져야 하는 법. 최근 대중검자는 심마 (心魔 : 마음의 병) 와 난치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반로환동공으로 억지로 감추고 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적당한 기회를 틈타 공개신체검사요구초식을 쓰십시오. 이는 전문적으로 대중검자의 반로환동공을 깨뜨리는 무공. 적중되자마자 대중검자는 완전히 몰락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룡점정, 용안 (龍眼) 을 그려넣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 "눈알을 다 그려넣은 용은 곧 승천하는 법이니 반로환동공을 깨는 게 곧 등룡의 비결이란 말이구려. 허허, 내 명심, 또 명심하리다.

" 인제거사는 먼저 잠을 줄였다.

새벽부터 밤까지 그는 주유천하를 시작했다.

조직도 없다.

황금도 세력도 없다.

도와줄 고수도 없다.

어차피 필마단기로 여기까지 왔다.

악몽같은 한달이었다.

공삼거사의 태자당 (太子黨) 이라는 말도 안되는 음해공격을 받은 뒤 칠주야 (七晝夜 : 일주일) 만에 세력의 삼분지 일을 잃었다.

혹자는 내게 사퇴를 말하고 혹자는 내게 대중검자나 회창객과의 합력을 얘기했다.

그러나 인제거사는 이를 무시했다.

좌절은 이르다.

시간은 넉넉했다.

아직 20일이나 남았다.

일주일 새 삼분지 일의 세력을 잃었다면 남은 시간동안 세배로 세력을 늘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자신도 있었다.

곧 만인전시기의 논검비무가 시작된다.

장기인 청룡사자후가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백성들은 곧 깨닫게 되리라. 누가 진정 도탄에 빠진 무림을 구할 인물인지. 우선 회창객과 한나라방을 집중 공격하리라. 내 세력을 잠식해 간 그자에게 쓴 맛을 보여주리라. 첫번째 논검비무가 끝나면 이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게되리라. 그런 뒤 대중검자의 콧대를 눌러주리라. 이제까지 인제거사는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일만은 삼갔었다.

자신의 무공과 실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만 보고 달려도 적들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무림은 암계와 술수가 판치는 곳, 적들의 독계 (毒計) 는 집요하고 철저했으며 위력적이었다.

이제 더 이상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다.

이에는 이, 철저히 적의 무공 약점을 공격하리라. 회창객은 다시 두아들의 악몽에 빠져 허우적대야할 것이며 대중검자는 나이와 건강의 벽을 넘지 못하게 되리라. 무림사 초유의 만인전시기 논검비무. 그것이 지금 인제거사에겐 유일한 구원이었다.

용을 그리리라. 만인전시기를 통해 만백성의 가슴을 가득 채울 거대한 용을 그리리라. 그리고 그 눈에 눈알을 그려 넣으리라. 그리하여 승천의 날, 하늘 저 높이 홀로 날아오르리라.

이정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