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북한돈 국제거래 부쩍 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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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북한돈 싸게 사가세요.” 지난달 30일 대만의 무역상사인 SIC사(타이베이 툰화로)는 서울의 한 북방무역 전문업체에 팩스를 보내왔다.“북한돈 3천만원을 미국달러화로 바꾸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교환비율은 나진.선봉지역의 시세인 달러당 북한돈 2백원.미화 15만달러에 북한돈 3천만원을 넘기겠다는 제의다.

그동안 소문으로 나돌던 북한돈의 대량거래주문이 확인된 것이다.서방국가에서 북한 채권거래가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은 있어도 북한화폐의 해외 대량유통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북한과 무역거래가 잦은 베이징주재 K무역상사의 李모씨는“현재 확인한 것만 대만.홍콩.베이징(北京).옌볜(延邊)등지에 총 6천여만원의 북한화폐가 굴러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1일 러시아 연해주 지역전문가인 국제농업개발원 이병화(李秉華)원장에 따르면 북한돈의 실수요층은 주로 옌볜의 조선족이나 연해주의 고려인,서방세계에 거주하는 해외교포들이다.

이들 조선족이나 고려인들은 장차 남북통일이 될 경우 독일의 선례에 따라 한국이 유리한 조건으로 북한화폐를 되사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다.결국 북한이 찍어내는 화폐는 모두 통일후 한국이 교환해줘야 한다는 점을 노려 투자차원에서 될수록 싼값에 북한돈을 통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해외교포들은 북에 두고온 이산가족과의 접촉이나 방북시에 사용하고 있으며 일부는 생활비로 북한에 비밀리에 역송금하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이밖에 일부 외국업체가 단기적인 환차익을 노려 북한돈의 국제거래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에 대만 무역상사가 한국 북방업체에 제의한 조건은 북한에서의 상업환율(무역결제에 적용)이 현재 달러당 약 2.2원임을 감안하면 파격적이다.북한에서 단순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이 약 80원이니 달러당 두달치가 넘는 노동자 임금을 고스란히 환차익으로 남길 수 있다는 계산이다.그러나 중국 옌볜이나 연해주 지역을 자주 드나드는 무역상들은“현재 북한접경 지역에서는 실제로 달러당 북한돈 3백원에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한편 최근 나진.선봉에서의 공단개발계획 추진을 위해 북한측과 수차례 접촉한 한국토지공사의 김용학(金龍鶴)북한실장은“북한측이 달러조달을 위해'외화벌이'차원에서 의도적으로 북한돈을 국경밖으로 흘려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환율 전문가인 LG경제연구원의 장원태(張原泰)박사도“북한은 최근 궁핍한 외환사정을 타개하기 위해 홍콩.마카오등에서 채권도 액면가격의 절반 이하로 대량 발행하고 있다”며“북한돈의 해외 대량유통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최근 두만강 인근지역에서 허용된 변경무역에서 일부 결제수단을 북한돈으로 사용하기로 함에 따라 앞으로 북한돈의 해외유출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이와 관련 북한경제 전문가들은“북한이 만일 의도적으로 자국화폐를 해외에 대량 유통시킨다면 이는 결국 대규모 통화증발 현상을 부채질해 북한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권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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