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노트] 공익 프로그램 내리는 공영방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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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안 그래도 말장난만 넘쳐나는 방송에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프로가 폐지되다니, KBS가 공영방송이라고 떳떳히 주장할 근거를 스스로 없앤 것 아닌가.” “책 프로 하나 없는 게 무슨 공영방송인가.”

KBS1-TV의 책 토론 프로 ‘TV, 책을 말하다’가 1일 327회 방송을 끝으로 돌연 폐지됐다. 프로그램 하차 이유에 대해 박석규 책임 프로듀서는 “공식적으로 들은 바는 없지만 저조한 시청률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시청자 게시판에는 며칠 새 200여 건의 항의성 글이 올라왔다. 공영방송에서 시청률이라는 잣대로 양질의 프로를 갑자기 없앤 데 대한 실망과 아쉬움 일색이었다. 13일 녹화 예정이던 소설가 신경숙씨는 “지상파 방송에서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책 프로가 이렇게 하루아침에 없어져도 되는 것이냐”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신씨의 말처럼, 2001년 시작한 ‘TV, 책을 말하다’는 방송 3사에서 유일한 책 토론 프로다. ‘사막의 오아시스’라는 시청자들의 비유가 과장만은 아닌 것이다. 이제껏 이 프로를 거쳐간 패널이 250여 명, ‘지성의 도마’ 위에 올랐던 책이 500여 권이다. 매 주 자체적으로 선정한 양서를 놓고 내로라 하는 패널들이 거침없이 벌이는 토론이 이 프로가 8년 가까이 고정 시청층을 유지했던 비결이다. 특정 출판사나 선정자의 입맛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책 선정은 출판 동네에서도 정평이 났다. 출판문화 진흥을 위해 제작비(회당 1000만원)를 쪼개 매 회 선정도서를 50여 권씩 구입한 점도 ‘TV, 책을 말하다’의 남다른 면모였다.

사실, 자정이 넘은 시각인 12시 35분 프로에 높은 시청률을 기대했다는 것부터가 납득하기 힘든 얘기다. 그나마 3% 좀 안 되던 시청률은 지난해 가을 개편 때 한 시간 뒤로 밀리는 ‘찬밥 편성’을 당하면서 더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가을 개편은 취임한 지 얼마 안 되는 이병순 사장이 ‘공영성 강화’를 외쳤던 시점이었다. 같은 채널, 프라임 타임에는 현재 시청률 40%의 일일극 ‘너는 내 운명’이 방영되고 있어 묘한 대비를 이룬다.

‘너는 내 운명’은 한국 드라마의 병폐적 요소가 총집합돼 KBS 시청자센터에 항의 의견이 하루가 멀다 하고 접수되는 드라마다. 하지만 시청률이 높아 그동안 두 차례나 연장됐다.

“방송국의 위상은 시청률이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의 질과 새로운 시도, 다양성 확보에 있다.” ‘TV, 책을 말하다’ 게시판에 오른 의견이다. 수신료가 아깝지 않은 공영방송, 말로만 ‘국민의 방송’을 외치는 것이 아닌 진정한 공영방송으로서 노력하는 KBS가 되려면 이런 지적에 귀 기울여야 한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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