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읽기>SBS 꿈의궁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가슴에 와닿는 인물성격도,장중한 서사도,치밀한 플롯도 좀처럼 찾기 힘든 90년대 소설들이 괜스레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던 차에 개성 창조에 성공한 TV드라마'꿈의 궁전'을 뜻밖에 만나 반가웠다.

한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모자이크처럼 이야기를 만들고 있지만 주축을 이루는 세 인물은 지배인(이순재),식당 여사장(이응경),조리사 보조(김지호)로 압축될 것이다.특히 이들을 주목하는 까닭은 작가가 의도했든 안했든 간

에 우리 시대의 노인.중년여성.청년세대의 특징들을 잘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순재가 연기하는 노인세대의 현재 심경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아마'허무'와'외로움'이 될 것이다.'꿈의 궁전'의 지배인이 어떤 이유로 어렵게 일군 자신의 기업과 가족을 떠났는지 아직 자세하게 드러나진 않고 있지만 그가 전혀 다른

삶을 시작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자녀들과 사회에 대한 큰 실망이었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업원들과 여사장의'아버지'역할을 훌륭하게 해내는 그를 보면서 혈연관계가 아닌 사람들이 가정을 꾸미는 이른바'대안 가족'의 한 가능성도

생각해 보게 된다.

다음으로 30대 여사장이란 인물은 우리 세대 중년들의'허위의식'에 대한 신랄한 조소로 다가온다.전쟁과 가난을 겪은 전세대가 피눈물로 쌓은 기반을 바탕으로 정신적.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기는 하지만 세상에 대한 진지함이 결여된채 명분

없는 나르시시즘에 빠져버린 천박한 모습,그것이 바로 돈많은 우리네 중년의 자화상이 아닐까.

'꿈의 궁전'의 여사장은 단지 남편이 없다는 것만 빼곤 인생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인다.어떤 경로로 그 엄청난 돈을 모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은 어차피 희극이니까 그렇다 해도,실제 현실에서 수상쩍은 부(富)를 어처구

니없이 누리고 사는 이들을 싫든 좋든 만나며 씁쓸한 심정을 몰래 삭였을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비현실적 인물인 여사장의 멍청한 이미지를 보며 시청자들이 왠지 모르게 속시원해지는 까닭은 바로 우리의 잠재된 분노를 달래는 풍

자의 힘일듯.

다른 주연에 비해 연기력이 처지는 김지호가 그리는 20대의 심리도 그렇다.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해'애착형성'의 기본이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그녀의 삶은 '공허'그 자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자신의 가치관대로 적극적

인 생활을 개척하기보다 주위의 이끌림대로 이리저리 휘둘리는 모습이나,진실한 정서교류에 실패하는 즉흥적인 애정행태등은 부유하는 신세대의 정신세계에 대한 하나의 비유이기도 하다.

요즘들어 코미디같은 드라마들이 울고 짜는 비극보다 역설적으로 시청자들의 심리에 잘 파고들 수 있는 현상은 아마 우리네 살림이 점점 힘들어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물론 희극감상이라는 몇십분의 마취효과로 나머지 시간내내 행복할 수 있

기엔 상황들이 너무 꼬여 답답할 뿐이지만…. 〈이나미 정신과 전문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