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쓰는가정문화>7.새것만이 좋은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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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주부 전남수(田南壽.60)씨는 같은 동네 젊은 주부들이 멀쩡히 쓸만한 물건을 척척 내다버리는 것을 보고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많다.
『우리는 이른바 절대빈곤 세대라 그런지 몰라도 생활에 여유가생겼다고 물건을 마구 사들이거나 마구 버리지는 않는데 전후세대들은 다른 것같아요.』 지난해 11월 서울YWCA가 주최한 제3회 「대물림 생활용품전」에 집안어른이 쓰시던 놋대야를 출품,전통상을 받기도 했던 田씨는 이제 우리도 못 살던 한(恨)을 무절제한 소비행태로 푸는 시기는 지난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 행사를 주관했던 서울Y 김효정간사는 『대물림 용품을 들고오는 주부들의 연령대가 50~60대 이상에 편중돼 오래된 것,금간 것,깨진 것을 끌어안고 살지 않으려 하는 요즘 세태를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양천구목동에 사는 주부 권민정(43)씨 역시 집수리나 이사때헌가구나 가전제품들을 한꺼번에 새것으로 바꾸는 사례를 많이 본다며 「절약=구질구질한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어린 세대들에게 그대로 전수되는 현실을 걱정한다.
일부 부유층의 극단적인 과소비 풍조 못지않게 자신도 모르게 소비만능의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보통 사람들의 의식 역시 위험수위에 도달했다는 지적들이다.
6개월이 안돼 쏟아져 나오는 신상품들,「새 것은 좋은 것,앞서가는 것」이라며 충동구매를 부추기는 각종 광고.여기에 홀려 무분별하게 사들인 가재도구가 집안에 쌓이면 이번에는 한정된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멀쩡한 물건을 유행에 뒤떨어 진다는 이유만으로 아파트 마당에 내놓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소비지상주의의 확산이 경제적 측면에서만 그늘을 드리우는 것이 아니다.사회학자등 전문가들은 이런 문화가 결국 사람들의 의식속에 인간관계까지도 쉽게 버리고 쉽게 살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고 경계한다.
8년간의 독일유학을 마치고 최근 돌아온 서강대 강사 이수자(39)씨는 『우리보다 훨씬 풍요로운 독일에서도 주부들이 가구.
부엌용품,심지어 커튼까지도 대물림해 사용하는 예가 흔하다』며 앞으로 정보화사회에선 이렇게 생활속에 자연스레 녹 아있는 전통이 국가간 경쟁력의 보이지 않는 자산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하지만 우리 사회에도 조금씩 청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2년전 시작된 쓰레기 종량제를 계기로 「버리기 전에 한번 생각하고,사기 전에 두번 생각하는」 신중한 소비풍토가 차차 뿌리내리고 있는 것.주부 김혜경(36.서울잠원동 한신아파트)씨는 쓰레기종량제 이후 필요한 신상품이 나와도 즉시 사 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구청이나 초등학교등에서 마련하는 알뜰장을 통해 필요한 물건을물물교환하는 인구도 크게 늘었고,스텐실.데코파주.포크아트등 헌가구를 재활용하는 생활예술이 인기를 끌고 있다.가전제품이나 가구를 고쳐주고 매매를 중계하는 가전가구제품 재활 용센터 역시 활성화되는 추세다.
손때묻은 생활도구 하나를 값비싼 신상품 못지않게 가치있게 생각하는 자세와 이런 물건들을 적재적소에 중계해주는 다양한 사회적 장치의 확산이야말로 쉽게 쓰고 쉽게 버리는 우리의 과시성 소비문화를 조금씩 치료해줄 것으로 보인다.
이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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