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투데이

민주주의 국가끼리는 전쟁을 않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현대 국제 정치학에는 ‘민주주의 국가끼리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있다. 18세기 말 독일 철학자인 이마누엘 칸트가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에서 전개한 주장을 발전시킨 것이다. 과거 민주주의 국가가 전쟁에 관여한 사실은 역사적으로 드물지 않다. 하지만 1980년대 미국의 마이클 도일 교수가 근대사에서 민주주의 국가끼리 전쟁을 한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다는 논문을 발표했을 때 전 세계 학계는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다. 민주주의 국가끼리는 단 한 차례도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민주주의=평화’라는 사고방식을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나 곧이어 출범한 조지 W 부시 행정부 내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사고방식 속에는 이런 민주주의 평화론이 자리 잡고 있다. 사회현상에서 유일하게 예외가 없는 법칙이라고 하는 사람까지 나왔다.

분명히 지금까지 이 학설을 뒤집을 수 있는 사례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난주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무력 분쟁은 어떤가. 그루지야는 유럽과 미국이 높이 평가해 마지않는 민주혁명을 일으킨 국가다. 러시아도 정기적으로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나라다. 러시아에서는 최근 언론탄압과 같은 일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자유주의라는 측면에서 러시아는 결코 우등생이라고 할 수 없다. 또 전임 대통령이 총리에 취임하는 등 실질적인 독재가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그렇다고 러시아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단정하기는 곤란하다.

혹자는 그루지야와 같이 민주주의 국가에 무력을 행사하는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해석하면 민주주의 국가라는 정의 속에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민주주의 국가끼리는 싸우지 않는다는 명제를 영원불변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뒤집을 수 없는 명제는 동의반복(同義反復)이며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데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평화론이 동의반복이 아니라면 이번 러시아-그루지야 분쟁은 대단한 이론적 과제를 낳은 사건이다. 민주주의 국가끼리라도 사안에 따라서는 무력 도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더는 두 나라가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갖추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분리독립 운동 같은 민족주의가 고조된다면 오히려 사태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이럴 경우 냉정한 군사 균형의 분석에 기초한 정책이 아닌, 도발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분리독립 운동에 대해 그루지야가 큰 위기감을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하는 독립파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 단계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규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루지야 측의 행동을 러시아가 더는 용납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른 것은 틀림없다.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도 지금으로선 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군사행동이 시작됐을 때 그루지야가 이길 수 없다는 것만은 명백하다. 친(親)그루지야 정책을 펴온 미국과 유럽 국가들도 러시아를 상대로 군사행동을 일으켜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이번 사태는 민주주의 국가인 그루지야의 오판이다.

결국 사회현상에 예외가 없는 법칙은 없다. 민주주의 국가나 지도자, 국민 모두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하더라도 평화가 이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와 경제의 상호 의존, 국제제도, 이 모든 것은 평화를 위한 장치다. 하지만 힘의 균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국제관계에서는 어느 정도 자제를 해야 한다. 결국 민주주의하에서 정치란 ‘가능성의 예술’인 것이다.  

다나카 아키히코 도쿄대 교수
정리=박소영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