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본4.11총선>4.내가 겪은 4.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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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B당의 K씨는 낙선자다.정치신인인 그는 지난해말 영입형식으로정계에 입문해 4.11총선을 치렀다.개표 결과 그는 5천여표 차이로 2위를 했다.『우리선거에서 진실을 얘기하면 당선될 수 없어요.진실인척 해야지 진짜 진실은 안됩디다.한 마디로 우리정치는 진실인척 하는 기술이에요.』 선거후 휴식을 겸해 여행중에있다는 K씨를 모호텔에서 만났을때 수척한 모습으로 난생 처음 치른 선거를 이렇게 정의했다.
그는 아직 선거라는 문화적 충격에서 완전히 헤어나지 못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주변에선 K씨의 낙선을 『예견됐던 일』이라고 치부한다.
그는 지난해말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지식인에불과했다.그러던 그가 정치라는 생소한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K씨는 그중 하나를 『내 안에숨어있는 정치욕』이라고 지칭했다.즉 무언가 자 신이 뛰어들어 현실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B당의 집요한 요구였다.
결국 고민 끝에 출마를 결심한 그는 지구당 개편대회때 운동원들 앞에서 세가지를 천명했다.첫째,선거법을 지키겠다.둘째,부정한 돈을 뿌리지 않겠다.셋째,상대후보를 비방하지 않겠다.그의 이상주의는 이렇게 출발했다.선거가 끝난 지금 그는 『결론부터 말하면 깨끗한 실패였다』며 『법을 지킨 대가는 낙선뿐이었다』고말한다. 먼저 그는 선거전이 시작되자마자 흑색선전부터 경험했다. 『선거초반 지역을 도는데 한 아파트 주민이 「상대후보는 유세 동원을 위해 5천원을 주지만 당신은 1만원씩 준다는데 사실이냐」고 묻더군요.』 돈을 쓰지않겠다는 모토를 내건 K씨로선 어처구니없는 모함이었다.
『그렇다고 고소.고발할 수도 없더군요.무엇보다 증인인 유권자가 사실을 밝히는 것을 기피하는 풍조가 팽배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흑색선전보다 정작 선거운동 내내 그를 괴롭힌 것은 유권자들로부터의 끊임없는 돈 요구였다고 한다.
그의 선거구는 대도시의 내로라하는 중산층들이 모여사는 아파트밀집지역.『선거운동 중반께 아파트 부녀회장이 찾아와 아파트 표는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노골적으로 돈을 달라더군요.사실 많은 돈도 아니었어요.기껏해야 몇십만원 정도였으니까.』 그는 부녀회장의 요구를 받고 솔직히 너무나 주고싶은 유혹을 느꼈다고 했다.당시 여론조사결과 그는 상대후보에게 근소한 차로 뒤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을 때였다.눈 앞에 표가 어른어른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자신이 내건 약속에 묶여 그 유혹을 뿌리쳤다.
『그후 지역구 내에 소문이 쫙 돌더군요.건방지다느니,인색하다느니 하는 소문들이요.심지어 선거를 포기했다는 말도 돌았어요.
』 이때 그는 정치신인으로서 막연히 중산층 시민에 대해 가졌던사회변혁의 기대와 믿음을 깡그리 상실했다고도 고백했다.돈을 뿌리지 않겠다는 그의 슬로건은 심지어 소속당 지도부로부터도 외면당했다.선거전이 종반에 접어들고 당 지도부가 지원 유세를 왔을때였다.돈을 주지않으니 청중들의 참석이 저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총재 말씀이 「K후보는 너무 고집이 세다」며 「떨어지는 길로만 가고있다」고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더군요.』 선거법도 그에겐 장벽이었다.
상가를 다니며 명함을 돌리던 그는 형사들로부터 제지를 받았다.선거법상 호별 방문이 금지되기 때문에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쓴돈 1억 홍보물 비용 『선거법이 눈 가리고 아옹식이에요.똑같이 상가를 방문하더라도 두집건너 한집씩 방문하면 상관없다고 하더군요.』 그의 실패담은 선거운동원 부분에서 절정으로 치닫는다.신인이고 지역사정에 어두운 그로선 처음 지구당위원장에 취임한 뒤 지구당 조직원들과 동책(洞責)들에게 큰 기대를걸었다.그러나 『최선을 다해 돕겠다』던 그들은 막상 선거운동이시작 되면서 하나둘 빠져나갔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당연한 결과였어요.돈을 풀지않는데 누가 붙어있겠습니까.운동원중 일부는 상대 후보진영으로 옮겨간 사람도있어요.』 선거가 끝날때까지 K씨 곁에 남아있던 운동원은 20여명정도.이들중 대부분은 대학강사인 부인의 제자들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인색한 선거를 치르면서도 K씨는 선거운동내내 자신이쓴 돈이 1억원이라고 고백했다.
『대부분 홍보물 비용이었어요.물론 1억원도 법정선거비용보다는많은 액수지만요.』 그의 4.11총선 체험담은 15대 총선에 나선 1천3백85명의 지역구후보중 아주 희귀한 경우에 속한다고볼 수 있다.실제로 그의 체험담을 들어보면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주의를 꿈꿨던 어느 허무맹랑한 신인의 당연한 좌절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정치 신인인 그의 체험담 속에서 우리는 한국정치의 현실이라는 두꺼운 벽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음에 또 출마할지를 결정짓지 못했다는 그는 자신이 겪은 15대 총선을 『한마디로 후보와 유권자 모두 다같이 지는 고스톱』이라고 규정했다.
더불어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도덕과 가치를 저버리고 후보와 유권자들 모두 만신창이로 더럽혀지면서 얻은 승리가 앞으로 우리정치에 무엇을 가져다 줄 수있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나 답답하다』고.
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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