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미로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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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민우는 묵묵히 채영이 안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역시 여자는 여자다.아무리 대담하게 삶에 부대낀다고 해도 여자는 역시 생명을 탄생시키고 가꾸는 보수적 존재인 것이다.그러나 이 시험은 피할 수 없다.상운이 이미 노리고 들어왔다면 그때 그때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다.만일 겁을 먹고 피한다면 오히려 더 큰 덫에걸리고 말리라.피할 길이 없을 때는 잠자코 운명을 맞는 것이 최선이다.민우는 정신과 의사를 하면서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 훈련을 해왔다.환자들은 자기 말 을 듣는 의사가 동요하는지어떤지 금방 알아차린다.
만일 의사가 동요한다면 환자들은 의사에 대한 신뢰를 잃고 말을 삼키고 만다.저렇게 쉽게 흔들리는 의사에게 어떻게 내마음 속의 깊은 말까지 할 수 있으랴….그러나 의사가 흔들리지 않으면 그들은 깊은 신뢰를 갖고 결국은 아무에게도 하 지 못했던 말까지 끄집어낸다.그 덕분에 민우는 비록 연쇄살인범을 맞았지만평상심으로 대할 수 있었다.그리고 이상하게 그에게는 그다지 적개심이 일지 않았다.민우 또한 악의 요소가 강하기 때문일까?세상에는 악이 필요하다.악은 선이 감히 감행못하는 용기가 있다.
악을 피하고 선만 좇아 사는 삶은 스스로 유약해지는 지름길이다.악이란 자기를 위해 타인을 해치는 것이고 선은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그러기에 선은 섣불리 용기를 내려고 하지않는다.남이 어떻게 생 각하는지,남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그러나 현대사회는 남의 의견이 분명하게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너무 급속도로 변해가고 있다.이런 사회에 적응하려면 악의 힘이,악의 용기가 필요하다.그리고 악은 두 려워만 할 대상은 아니다.악이란 어둠 같아서 한줄기 빛이 들어오면 금세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악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그렇게 지옥같지만 지나고 나면 악몽같이 고통은 사라지고 만다.민우가 아무 말도 않고 있자 채영은 이내 자기 의견을 수그렸다.그녀는 현명한 여자였다.자기를 주장할 줄도 알지만현실을 볼 줄도 안다.
『미안해요.당신 하고싶은대로 하세요.하지만 명심하세요.저는 그 사람하고 당신이 만날 때 조금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그리고 그 사람이 당신에게 수작을 부리려 한다면 당신이 뭐라고 해도 그 사람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해요.나 역시 당신이 내곁에 있는 것이 좋으니까.』 채영은 민우를 데리고 영화를 보러갔다.액션배우 키아누 리브스가낭만적인 영화에 출연했다고 화제가 됐던『구름속의 산책』이라는 영화였다.영화는 아름다운 포도밭을 중심으로 남녀간의 사랑얘기를다뤘다.오랜만에 민우는 고전적인 영화를 보고 는 한껏 흥취에 젖었다.채영을 만난 이후로 부쩍 영화볼 기회가 많아졌다.그녀는삶이 단조로울만 하면 민우를 데리고 영화관에 갔다.그리고 그날밤에는 꼭 영화 속의 주인공인양 황홀하게 민우를 이끌었다.그러면 민우는 새롭게 에너지가 그 득해지는 것이 느껴지곤 했다.환상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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