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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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2부 불타는 땅 운명의 발소리(24)유곽이라는 말에 지상이길남을 바라보며 마주 섰다.요즈음 안 하던 짓을 하지 않나.갑자기 술을 많이 마시는 게 뭔가 이상하다는 소리가 들리더니,그랬구나.무슨 일이 있었구나.
『너 마음고생하고 있었는지는 몰랐다.미안하다.』 『내가 못난거지.』 허청허청 걸으면서 길남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어허어허 소리를 질러댔다.
『좋은 여자였다.어허허.좋은 여자.그런데 말이다,나 하나 살려놓고 그 못난 게,저는 죽었다니… 허허.일본이 버티면 얼마나더 버티겠다구! 그걸 못 기다렸다니,그래서 내 마음이 더 탄다그거다.』 『쉿,취했다고 말 함부로 하고 그러지 말아.』 『저쪽에 오무라라고 있다.여기서 먼 거리도 아냐.거기가 불바다가 됐던 게 언제인지 아냐.작년 가을이래.새까맣게 하늘을 덮으며 비행기가 날아왔대.크기도 엄청난 비행기였다는 거야.』 『불바다가 되어 가고 있는 게 거기 뿐이라더냐.이미 일본 전토 아니냐.그건 나도 들어서 안다.』 당시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던「시국방공 필휴」라는 유인물은 미군의 공습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서부터 예상되는 폭탄의 위력까지를 적어놓고 있었다.그러나이날 59대의 4발 중폭격기 B29가 떨어뜨린 폭탄이 보여준 파괴력은 그 런 유인물을 비웃고 있었다.그것은 시가지에서 폭탄의 피해를 직접 겪거나 목격한 사람들을 공포의 늪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6월16일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규슈 공습의 첫비행 이후,미군의 폭탄은 땅위를 불바다로 만드는 것보다 더 큰 공포라는 이름의 불길을 피워올리면서 일본인들의 가슴에 엄청난 크기의 절망의 구덩이를 만들면서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런 말 함부로 입밖에 내고 그럴 때가 아니다.어디서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는데.』 『임마,낮말은 새가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지만 여기 조선말 알아들을 놈,너 밖에없어.』 『아니다.내가 볼 때는 미국이 먼저 이쪽 규슈를 노리는 거 같애.』 무슨 근거로 이 친구는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뜬소문 가지고 함부로 할 소리도 아닐 뿐더러 이렇게 쉽게 내뱉어도 좋을 얘기는 더더욱 아닐 텐데.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상은터덜터덜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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