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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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고3이 된다는건 무엇이었던가.
풍랑과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우주 한가운데의 블랙홀처럼,바람 한 점없고 호수같이 평온한 바다가 있다고 했다.어떤 악천후보다 더 무서운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했다.배가 진공상태같은 거기에 들어서면,옛 뱃사람들은 선창에 엎드려 울었다고 했다.바람과 물살이 없으니 배가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다.
그건 아주 끔찍한 일이었을 거였다.
내 화려한 젊은 날의 진공상태는 어머니가 도시락을 매일 두 개씩 싸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아침7시부터 밤10시까지의 학교생활,두통과 소화불량과 불면의 밤들이 이어졌다.수학능력시험에 대비한 모의고사가 계속됐고 그 점수가 나올때마다 우리를 절망시켰다. 하지만,선창에 엎드린 선원들을 힘들게 만드는게 고향땅의가족들과 흥청이는 항구의 예쁜 여자들 때문이듯이,자연이 한껏 아름다운 4월이 별볼일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잔인하게 여겨지듯이,우리들이 점수때문에 절망했던건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보장해줄우리들의 진진한 미래 때문이었다.그것은 우리가 일찌감치 포기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진한 유혹이었다.
하루에 두 개씩의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매일 매일 나 스스로 작성한 계획표를 어기고 후회하고 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중학교3학년 시절,자위행위 때문에 수없이 절망하고 후회하던 때처럼,자책감과 자괴감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엄습해 오는 그런 지랄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고3이 된다는건 무엇이었던가.
첫 모의고사가 끝난 직후,우리 반 아이들은 다른 날하고 아주달랐다.교실은 진공상태처럼 조용했는데,아이들은 각자 자기자신에대해 생각해 보는 데에 바빠서 옆자리의 누군가와 수다 떠는 걸잊은 모양이었다.대부분의 아이들은 무기력한 표정을 하고 책상 바닥이나 창밖의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랬다.볼펜을 입에 물고,나도 멍청하니 잿빛 하늘을 한번 올려다 보고 교실 바닥을 한번 내려다 보고 그러고 있었다.
내려다 볼 때면 한 여자애의 다리가 보였는데,다리라기보다는 다리를 감싼 스타킹이 보였는데,게다가 까만 스타킹이 어서 치마 아래로 드러난 허벅지 부분에 난 구멍이 눈에 확 띄었다.구멍으로 드러난 맨살이 유난히 하다.그걸 보면서 나는 우리들의 처지가 약간 슬퍼졌었다.그뿐이었다.그 여자애는 평소에 한번도 흐트러진 꼴을 보이지 않던 애였던 거였다.
계집애들은 고3이 되니까 머리도 자주 감지 않는 것 같았다.
고3 교실에서는 머리를 손수건으로 뒤쪽에서 하나로 질끈 동여매는 스타일이 갑자기 유행했다.나는 버스나 전철같은 데서 자리 하나가 나면 저쪽에 섰다가도 무턱대고 궁둥이부터 들이밀고 나서는 아줌마들을 경멸하곤 했는데,고3 계집애들은 벌써부터 삶에 대한 그런 염치없음과 게걸스러움을 느닷없이 드러내보이곤 했던 거였다. 대학에 가려면 정말이지 머리가 나빠서는 안됐다.우선 입시제도라는 것이 수시로 바뀌는 바람에 그걸 제때에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머리는 좋아야 할 것이었다.서울의 6개 대학만이본고사를 치른다고 했기 때문에,대부분의 아이들이 해당 6개 대학을 우선 목표에서 제외시켰다.물론 나도 거기에 속했다.복잡한건 정말이지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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