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30. 서울대 국악과 초창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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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서울대 국악과 학생들이 합주하는 모습. 어려서 부터 국악기를 전공한 학생이 입학하기 시작한 해였다.

1959년 3월 새로 생긴 서울대 국악과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한 학생들의 대다수는 국악과가 뭘 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국악기를 본 적도 없었다. 신설된 국악과에 응시생이 전혀 없자 서양음악 전공 지원자 중에서 신입생을 뽑았기 때문이다.

“국악과에서 배울 수 있는 악기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학생들을 모아놓고 가야금·거문고·피리·대금·해금 등을 보여준 뒤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도록 했다. “이 악기들은 이런 소리를 낸다.” 선생들이 하나씩 악기의 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이러한 풍경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강사로 임용된 내게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당시 음악대학장 현제명 선생과 국악과장 이혜구 선생이 “큰 뜻을 품고 국악과를 차려놨는데 지원하는 학생이 없으니…”하며 걱정했다. 그리고 당시 음악대학 학생과장을 맡고 있던 성악과 김학상 선생에게 부탁했다. “제자 중에 국악을 할 만한 학생이 있으면 잘 좀 이끌어보시오.” 김 선생은 고등학생 제자 중에서 음악적 자질이 풍부한 아이들에게 “앞으로는 국악이 매우 중요한 시대가 온다”며 국악과 진학을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국악이론계의 원로급 학자인 권오성 한양대 명예교수, 송방송 한국종합예술대 교수 등도 본래 김학상 선생의 성악 제자였는데 그의 권유로 국악과에 입학해 대성한 분들이다.

현제명 학장은 내게 강사 자리를 제의할 때 “일주일에 한 시간만 내 달라”고 했지만 실제로 시간표를 받아보니 수업은 주당 10시간이 넘었다. 나는 다른 직업은 생각도 못하고 4년 동안 꼬박 가야금 강사로 생활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악이나 피아노를 전공하려고 시험을 봤다가 국악과로 배정된 학생들 중에는 “동네에서는 제가 피아노과를 다니고 있는 줄 알아요”라고 털어놓는 경우도 있었다.

마음도 양악에 가 있었지만 마지못해 국악을 하는 학생이 많았다. 하지만 그 중에는 국악에 매진하겠다고 아예 마음을 고쳐먹은 학생도 여럿 있었다. 이들이 나중에 우리나라 국악계를 이끄는 보배로운 존재가 된 것이다. 앞날을 내다보고 마음을 굳게 먹는 것이 이처럼 중요하다.

이 같은 학생 부족 현상은 55년 설립된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중·고교 6년 과정) 졸업생들이 62년부터 입학하면서 차츰 개선됐다. 어려서부터 국악을 공부한 학생들이 서울대로 오기 시작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국악사양성소가 72년 국립국악고로 발전하는 한편 국악예술고도 생겼다.

또 서울대에 이어 한양대·이화여대에 각각 72년, 74년 국악과가 신설됐다. 이후 국악과가 전국적으로 퍼져 지금은 20여 개 대학에 국악과가 설치됐고, 입학 경쟁률도 상당히 높아졌다.

서울대 국악과조차 지망생이 전혀 없던 암담한 시절에도 미래를 예견하고 소신을 가졌던 젊은이들이 있었기에 국악이 이만큼 발전하게 된 것이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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