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혁시시각각

얼치기 이상주의가 남긴 후유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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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하지만 수험생과 학부모, 그리고 선생님들까지 ‘반쯤 미치게’ 만드는 건 그게 아니다. 올해부터 시행된 이른바 등급제 수능인 것이다. 자칫하면 1점 차이로 등급이 갈린다. 따라서 어딜 지원해야 할지도 오락가락해야 할 판이다. 다음달까지는 내 등급을 알 방법도 없다. 그러니 무조건 여기저기 지원해 놓고 본다. 교사들은 어떻게 진학지도를 할지 몰라 쩔쩔맨다. 그러는 사이 논술학원은 미어터진다. 같은 등급이 많아 논술의 미세한 점수 차이로 당락이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이런 제도가 나왔는지 이해가 안 된다. 모든 정책의 기본은 공정성과 예측가능성이다.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 인생을 좌우할 교육정책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등급제 수능은 정반대다. 쉽게 말하면 로또다.

먼저 공정성. 뭐든 열심히 했으면 한 만큼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공정하다. 하지만 등급제 수능은 안 그렇다. 예를 들어 92점 이상이 1등급이라면 92~100점까지는 다 1등급이다. 91점은 1점 차이로 2등급이 된다. 또 100점·100점·91점(총점 291점)을 맞은 아이보다 92점·92점·92점(총점 276점)을 받은 아이가 더 높은 등급을 받는다. 앞으론 아이들에게 “네 적성을 최대한 살려 두각을 나타내라”고 말하는 게 우습게 됐다. 대신 “전 과목을 적당히 하는 게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해야 할 판이다. 이런 교육으론 절대로 특정 분야의 천재가 나올 수 없다. 하긴 애초부터 그러려고 이런 제도 만들어냈겠지만.

다음은 예측가능성. 당연한 얘기지만 자칫하면 한 문제로 등급이 달라지는데 예측이 가능할 수가 없다.

아무리 강변해도 이 제도는 실패한 것 같다. 수험생들이 수능 1~2점에 매달리지 않게 해준다더니 1~2점으로 등급이 달라지게 했으니 더 기가 막힌다. 과외가 줄어들 것이란 주장과는 달리 수험생들을 논술학원으로 몰려가게 했으니 선무당이 사람 잡은 셈이다. 게다가 교사들이 진학지도에 손을 못 대게 만들어 놨으니 학교의 권위를 더 실추시켰다는 비판에서 비켜 설 수가 없다.

이 어처구니없는 제도는 대통령 자문 교육혁신위원회가 2004년 8월 만들었다. 전성은 당시 샛별중학교 교장이 위원장이었고 김민남 경북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위원회의 원래 목표는 대학서열구조 해체였습니다. 수능을 폐지하고 내신만으로 대학에 가게 하자는 것이죠. 수능을 당장 폐지할 수 없어서 나온 게 등급제 수능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수능을 무력화시키면 대학들이 결국 내신으로 학생을 뽑을 것으로 본 겁니다. 쉽게 말해 386 코드의 평등주의 교육정책이었습니다.”

교육혁신위원회에 반대해 온 J교수의 말이다. 당시 위원회는 수능을 5등급으로 만들자고 주장했지만 안병영 교육부 장관이 한사코 반대해 그나마 9등급이 됐다. 만일 그 주장대로 5등급 수능이 도입됐으면 지금 어떤 혼란이 벌어지고 있을지 생각하면 끔찍하다.

이런 희한한 입시제도는 앞으로 몇 년은 그냥 가야 한다. 입시제도를 바꾸려면 3년 전에 예고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내년 2월이면 그만둔다. 이런 ‘혁신적인’ 제도를 만든 위원회는 이미 해체됐고, 이를 주도한 사람들도 다 뿔뿔이 흩어졌다. 이 정책으로 고통 받은 수험생과 학부모는 올해가 가면 가슴을 쓸어내리며 모든 걸 빨리 잊고 싶을 것이다. 대신 내년의 수험생·학부모들이 다시 치를 떨며 아마추어 이상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의 혼란과 고통을 반복할 것이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