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22. 단 한번의 가르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만남은 우연히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가야금을 배우던 부산 국립국악원에는 아주 나이가 많은 원로 악사가 한 분이 있었다. 이름은 김영제(1883~1954·사진). 국립국악원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장악원 출신 악사였다. 당시 그는 몸이 너무 쇠약해 연주는 전혀 하지 않았다. 국악원에 가면 항상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노인네로 기억됐던 분이다. 김영윤 선생에게 배우기 위해 국악원을 찾은 어느 날이었다. 김영윤 선생은 안 계시고 이 노악사만 있었다. 당시 국악원에는 사무실 겸 합주실로 사용하는 큰 방 옆에 조그만 연습실 두 개가 있었는데 나는 스승을 기다리며 한 연습실에서 혼자 가야금줄을 튕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습실 문이 열려 쳐다보니 김영제 선생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다정하게 웃는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잔뜩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너 가야금을 제대로 하려거든 부드러운 소리보다는 단단한 소리를 써야 한다.” 그는 대뜸 이 말부터 던졌다. “그러려면 현침에 가까운 쪽의 줄을 뜯어야 하는 것이다.” 가야금의 머리 쪽에서 줄을 받치고 있는 나무 조각을 줄이 베고 있는 베개라는 뜻으로 현침(絃枕)이라고 부른다.

그는 두 번째 말을 던졌다. “보통 가야금을 하는 사람들은 현침에서 떨어져 치는 부드러운 소리를 좋아하지만 그런 소리는 가볍고 허(虛)한 소리다. 다른 사람들처럼 쉬운 소리를 내려 하지 말고 어려운 소리를 써야 한다.”

나는 아직까지 이 말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말이 가슴에 들어와 박힌 모양이다. 단 한번의 짧은 레슨이었지만 이 조언은 나의 ‘가야금 인생’과 늘 함께 했다. “쉽게 가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지극히 당연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명제였기 때문이다. 김영제 선생은 일찍이 고종 황제 때 궁중악 지휘자쯤 되는 전악(典樂)이었고 전공이 가야금이었다. 집안 사람들이 모두 국악인이었으며 그의 할아버지 김종남 선생은 초대 국악사장을 지냈을 정도였다. 당시 나는 그가 누군지도 모르다가 나중에야 대단한 인물이란 걸 알았다. 그래서인지 이 분에게 얼떨결에 받은 단 한 번의 레슨은 아주 영광스럽고 신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김영제 선생은 매일 가야금을 배우러 오는 어린 학생을 신통하게 본 모양이었다. 이때 그는 현침에 가까운 쪽에서 소리를 내라는 주문과 함께 왼손으로 줄을 껴잡고 음을 내리는 퇴성법(退聲法·어떤 음을 낸 다음 한율 또는 두율 낮게 끌어내리는 기법)에 대해서도 조언해줬다. 정악에만 있는 퇴성법에서 왼손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지적했다. 나는 산조를 배우기 시작한 뒤에도 정악을 놓지 않고 중요시했다. 이러한 때에 조선시대 노악사에게 정통한 레슨을 짧게나마 받은 건 정악 기법의 정수를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