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가야금을 제대로 하려거든 부드러운 소리보다는 단단한 소리를 써야 한다.” 그는 대뜸 이 말부터 던졌다. “그러려면 현침에 가까운 쪽의 줄을 뜯어야 하는 것이다.” 가야금의 머리 쪽에서 줄을 받치고 있는 나무 조각을 줄이 베고 있는 베개라는 뜻으로 현침(絃枕)이라고 부른다.
그는 두 번째 말을 던졌다. “보통 가야금을 하는 사람들은 현침에서 떨어져 치는 부드러운 소리를 좋아하지만 그런 소리는 가볍고 허(虛)한 소리다. 다른 사람들처럼 쉬운 소리를 내려 하지 말고 어려운 소리를 써야 한다.”
나는 아직까지 이 말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말이 가슴에 들어와 박힌 모양이다. 단 한번의 짧은 레슨이었지만 이 조언은 나의 ‘가야금 인생’과 늘 함께 했다. “쉽게 가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지극히 당연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명제였기 때문이다. 김영제 선생은 일찍이 고종 황제 때 궁중악 지휘자쯤 되는 전악(典樂)이었고 전공이 가야금이었다. 집안 사람들이 모두 국악인이었으며 그의 할아버지 김종남 선생은 초대 국악사장을 지냈을 정도였다. 당시 나는 그가 누군지도 모르다가 나중에야 대단한 인물이란 걸 알았다. 그래서인지 이 분에게 얼떨결에 받은 단 한 번의 레슨은 아주 영광스럽고 신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김영제 선생은 매일 가야금을 배우러 오는 어린 학생을 신통하게 본 모양이었다. 이때 그는 현침에 가까운 쪽에서 소리를 내라는 주문과 함께 왼손으로 줄을 껴잡고 음을 내리는 퇴성법(退聲法·어떤 음을 낸 다음 한율 또는 두율 낮게 끌어내리는 기법)에 대해서도 조언해줬다. 정악에만 있는 퇴성법에서 왼손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지적했다. 나는 산조를 배우기 시작한 뒤에도 정악을 놓지 않고 중요시했다. 이러한 때에 조선시대 노악사에게 정통한 레슨을 짧게나마 받은 건 정악 기법의 정수를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황병기<가야금 명인>가야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