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선민기자의가정만세] 아이 낳기가 무서운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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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결혼한 동갑내기 H씨(34)부부. 결혼 1주년이 지났건만 아직 아기가 없다. 적은 나이도 아니나 당분간 아기 가질 생각도 없다. 요즘 유행하는 이른바 ‘딩크족’(맞벌이에 무자녀)이 아닌가 싶겠지만, 천만의 말씀. 엄두를 못 내고 있을 뿐이다. 맞벌이인 데다 양가 어른들이 지방에 있어 아기를 낳아도 봐줄 수 없기 때문이다. 둘 다 오전 8시 전에 출근해 최소 오후 9시는 돼야 귀가하므로, 12시간 이상 봐줄 시간제 육아 도우미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입주 도우미 시세를 알아보니 중국동포(조선족) 월급이 120만~150만원 정도란다.

역시 지난해 결혼한 S씨(36) 부부. 아직 아이를 갖지 않았지만, ‘낳기 무섭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믿을 만한 육아 도우미를 구하기 위해 죽을 고생 했다는 주위 맞벌이 부부들의 하소연을 귀가 닳도록 들은 탓이다. 야근과 술자리가 잦은 회사 특성 때문에 친정 어머니, 시어머니, 시간제 육아 도우미 등 3명이 하루 종일 릴레이로 아이를 봐준다는 한 선배의 얘기를 듣고 나서는 공포심이 더 심해졌다.

H씨나 S씨 부부 모두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맞벌이 부부다. 무엇이 이들을 ‘비자발적’ 딩크족으로 만들었을까. 이들에게 사회가 얼마나 비협조적으로 구는지 따져보면 답은 나온다. 우선 정부나 지자체의 출산지원책은 중산층 맞벌이 부부에겐 전혀 와 닿지 않는다. 대부분 다자녀 가정이나 저소득층 위주이기 때문이다. ‘무주택 가정일 경우 3자녀 이상 낳으면 국민임대주택 우선입주권을 부여한다’거나, ‘셋째아이를 낳으면 월 10만원 양육비 지급’ 등이 한 예다. 다자녀 가정과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중산층에 대해서도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원책이 꼭 돈일 필요는 없다. ‘육아 도우미 비용 50% 지급’ 같은 경천동지할 지원이 아니라면, 돈 몇 푼 더 준다고 안 낳으려던 아이를 낳진 않는다. 차라리 보육시설에 맡기기 곤란한 0세부터 3세, 그것도 안 되면 적어도 2세까지의 육아를 위해 제도적 지원을 하는 것은 어떨까. 육아휴직 기간을 늘릴 수 있도록 정부에서 보조하는 것과, 실제로 육아휴직을 법 규정대로 쓸 수 있도록 관리·감독하는 것이 주 내용이 될 것이다.

기업도 까칠한 태도를 바꿔야 한다. 외벌이에서 맞벌이로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한 지 오랜데도 여전히 기업, 아니 윗사람 마인드는 ‘회사 따로, 가정 따로’다. 올 초 휴일 근무한 아내 때문에 아이를 돌보느라 휴일근무에서 빠져야 했던 P씨(37). 며칠 뒤 팀장이 조용히 부르더란다. “아무리 사정이 그래도, 아이를 봐야 한다고 출근을 안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책망이 이어졌다. 일각에선 ‘홈퍼니’(홈+컴퍼니, 가족친화기업) 운동도 벌어지고 있지만, 아직은 회식 한 번 빠지고 일찍 귀가하려면 남자건 여자건 강심장에 철가면이 돼야 하는 상황이다. 무엇이 아이를 못 낳게 하는가.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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