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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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천마산에 갔을 때 자살미수를 벌였던 양아와 영석이 그리고 내가 한팀이 돼서 강북 쪽의 큰 병원들을 돌아다녔다.
『혹시 의식을 잃어서 신원을 알 수 없는 환자가 없는지 알아보러 왔습니다.우리가 찾는 건 여고생인데요….』 두 곳에서는 신원미상의 여자 환자가 있다고 해서 확인해봤지만 써니는 아니었다.그중의 한 명은 무슨 사고를 당했는지 얼굴의 반쪽이 완전히깨져서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 순간적으로 가슴이 쿵쾅거렸다.그 환자의 코와 입에는 무슨 호스가 꽂혀 있었다.
『아니야.머리랑 치마를 보라구.』 양아가 자신있게 말했다.정말 턱없는 비교이기는 했다.써니 보다 덩치도 훨씬 컸고 가슴도너무나 큰 아줌마였다.사람이 의식을 잃고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걸 보는 건 아주 끔찍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다행이야.난 저런 꼴로 있는 써니는 보고 싶지가 않아.』 내 말에 영석이가 나를 돌아보면서 대꾸했다.
『그런 생각은 사치라구.저런 꼬라지로라도 살아만 있어주면 됐지.그러면 다행 아니냐구.』 여섯 군데의 병원을 돌고나니까 11시가 다 돼 있었다.영석이는 다른 사정이 있다면서 10시쯤에먼저 돌아갔다.양아와 둘이,마지막에 둘러본 순천향 병원을 나서는데 양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약 먹고 난리쳤을 때도 얼마나 흉했을까….』 『아니,그땐… 아주 예뻤어.너같지 않았다니까.피부도 창백해보이는게 요술에 빠진 공주님 같았어.』 병원들을 도는 동안 내내 웃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양아를 조금 웃겨주려고 그런 거였다.양아가 실제로 조금 웃었다.양아는 써니네 친구들 중에서 가장 뚱뚱한 데다가 덜 예쁜 편이었다.그래서 그런지 늘 사내아이처럼 투박하고 거칠게 굴었 지만 속마음까지 그럴 리는 없었다.
『니가 아까 써니 아빠 이야기 했었잖아.』 양아가 갑자기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써니아빤 죽거나 하지않았어.이건 정말 아무도 모르는 거야.써니가 나한테만 해준 이야기거든.써니가 나하고 제일 친했던 건 너도 알지.』 『아는대로 말해 봐.그럼 써니아빤 어딨는 거야?』 『그건 나도 몰라.
내가 아는 건,써니아빠는 써니가 우주비행사나 그런게 되면 좋겠다고 그랬다는 거야.언젠가 써니가 느닷없이 그러는 거야.그래서내가 눈을 크게 떴더니 써니는 소리없이 웃기만 하고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더 묻 지는 마,그런 표정을 하고 말이야.』 『그건 써니가 혼자 상상해본 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라.
』 『아냐,그게 아냐.왜냐하면 써니는 어느날부턴가 갑자기 우주비행사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런 책도 사고 그랬거든.』 『그게 언제 이야기지?』 『그러니까… 작년 가을이었나 뭐 그래.』 『그럼 써니엄마가 뭔가를 알고 있겠네.』 『아니.써니는 엄마하고단 한번도 아빠 이야길 해본 적이 없대.써닌 정말… 아주 지독한 애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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