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시대를 앞서 간 비운의 여인… 사랑은 열정인가, 조건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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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사랑도 시대의 자식이다. 계급·신분이 아닌 소위 ‘무조건’의 사랑이 싹튼 건 근대 이후다. 조건에 울고 웃는, 그래서 조건을 뛰어넘는 사랑을 희구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소설이란 문학 장르도 발아했다. 전통·자본·농촌·도시 등의 충돌에 따라 인간관계에 급격한 변화가 몰아쳤고, 얘깃거리가 많아졌다. 당연히 사랑의 주체도 하늘·귀족에서 땅·시민으로 내려왔다.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1775~1817)은 이런 시대 분위기를 대표했다. 스케일은 크지 않았지만 근대 영국 사회의 속살을 사랑이란 단어로 짚어냈다. 보다 정확히, 사랑보다 결혼에 가깝다. 덕분에 그는 ‘현대의 소설’인 영화에 가장 자주 인용되는 작가가 됐다. 『오만과 편견』『센스 앤드 센서빌리티』『엠마』 등이 영화로, TV 드라마로 숱하게 번안됐고, 또 앞으로도 계속 나올 예정이다.

 제인 오스틴은 멜로드라마의 전형을 보여줬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랑의 가장 큰 장벽은 돈. 그는 “사랑이 밥 먹여주냐”는 속된 말의 진실과 위선, 순수와 고통을 드러냈다. 그가 지금에도 전혀 낡아 보이지 않는 것은 그런 사랑의 통속성과 진정성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신작 ‘비커밍 제인’(제인 되기)은 소설가 제인 오스틴에 집중한 영화다. 2003년 작가 존 스펜스가 쓴 동명의 전기소설을 스크린에 옮겼다. 평생 독신으로 마치 소설 속의 캐릭터처럼 살아갔던 작가의 삶을 사실과 픽션을 섞어가며 재현했다.

 ‘비컹밍 제인’에는 많은 대립항이 숨어 있다. 순수의 여성과 경험의 남성, 나른한 농촌과 번잡한 도시, 욕망의 열정과 절제의 미덕 등이 충돌한다. 그 가운데 근대사회의 작동원리인 ‘돈’이 자리 잡고 있고, 자본의 압박에서 벗어나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사랑을 갈망하는 두 남녀의 몸짓이 메아리 친다.

 가난한 시골 목사의 막내 딸인 제인 오스틴(앤 헤서웨이). 활달한 성격에 글쓰기 솜씨가 훌륭하다. 독립심이 강한 제인은 런던에서 잠시 내려온 젊은 변호사 톰 리프로이(제임스 맥어보이)에게 끌린다. 반면 궁핍한 살림을 생각하면 돈 많은 집안의 청혼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다. 톰 역시 판사인 외삼촌에 기대어 살며 가족을 부양해야 할 신세다. 과연 사랑은 열정인가, 조건인가.

 제인과 톰의 고충은 21세기 연인들의 그것과 크게 다름이 없다. 신파적 요소가 다분한 설정임에도 영화는 전혀 진부해 보이지 않는다. 비운의 사랑에 맞서는 두 남녀의 격정을 때로는 냉정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낚아채기 때문이다. 시대와 불화하는, 아니 시대를 앞서가는 제인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다. 전체적으론 여성 취향이지만 가을철 마음이 허한 남성들이 즐기는 데도 무리가 없다. 사랑의 본질은 결국 통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감독 줄리언 재럴드. 11일 개봉. 12세 관람가.
 

박정호 기자

주목! 이 장면 
제인은 톰에게 두 차례 이별을 고한다. 한 번은 남자에 실망해서, 또 한 번은 남자를 위해서. 그때 제인이 타고 있던 마차의 창문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시선을 주의해 보시길! 창은 세상을 보는 눈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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