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이쓰는가정이야기> 유치원 졸업식 소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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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얼마전 막내의 유치원 졸업식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었다.졸업생 대표가 답사를 읽고 있었고 비디오기사는 그것을 열심히 촬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디오카메라에 달린 조명등이 무대커튼에 닿았는지 그만커튼에 불이 붙어버렸다.처음에는 연기가 조금 나는것 같더니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조그만 불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집 사진기사인 나는 무대 바로앞에 앉아 있었던터라 앞뒤 생각할 틈도 없이 무대위로 뛰어올라가 커튼에 붙은 불을 맨손으로 털어껐다.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린 사람들은 조금 놀랐고 연기때문에 누군가 기침을 한두번 했지만 이내 평온을 되찾아 아무 일도 없었던양 졸업식이 진행됐다.
건축을 공부한 나는 그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안다.
40평이 채 안되는 지하강당에 2백명쯤 되는 아이.학부모가 빼곡히 차 있었는데 만일 불이 조금만 크게 붙기 시작했다면 큰일날뻔했다.놀란 사람들은 자기 아이를 찾으랴,하나밖에 없는 출구로 뛰어나가랴 난장판이 벌어졌을 것이고 그 와중 에 몇명쯤은크게 다쳤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그 일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는지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아들의 유치원 선생님들과 다른 학부모들 앞에서 기민한 판단력과 민첩한 행동을 보였다는 것에 내심 스스로 만족하고 있던 내게는 김이 빠지는 노 릇이었다.
나중에 졸업축하 저녁을 사주면서 아빠가 슈퍼맨이라 아직도 믿고 있는 내 아들에게 물었다.『민기야,아까 아빠가 갑자기 무대위로 뛰어올라갔었지.왜 그랬는지 아니?』민기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응,아빠가 사진찍다가 먼지가 많아서 먼지털려고 그랬잖아.』속으로『이 멍청한 녀석…』하고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어린 민기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우리 어른들이 겪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안전한 것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내 아이들에게 안전하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는 것이 내자랑이 아니요,아비된 내게 주어진 일이라 생각하니 지금 자판을두드리는 내손에 새삼 힘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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