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유문화사 정진숙 회장 "꼭 내야 하는 책 내는 게 진정한 의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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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출판계의 산증인 정진숙(95·사진) 을유문화사 회장이 60여년의 출판 인생을 정리한 자서전 『출판인 정진숙』(을유문화사)을 펴냈다.

정 회장은 해방 직후 집안 어른이었던 위당 정인보 선생으로부터 “우리말·우리글·우리민족의 혼을 되살리는 유일한 문화적인 사업이 출판”이라는 말을 듣고 1945년 12월 1일 을유문화사를 창립했다. 출판사 이름 ‘을유((乙酉)’는 광복되던 해의 간지에서 따온 것이다.

출판이 쉽지 않은 때였다. 우선 문맹이 많았다. 일단 한글부터 가르쳐 책을 읽어줄 독자를 만들어내야 할 때였다. 그래서 한글글씨본 『가정 글씨 체첩』(1946년)이 을유문화사의 첫 책이 됐다.

종이도 부족했고, 인플레가 심해 책값을 정하기도 힘들었다. 책값 란을 비워둔 채 책을 인쇄하고 책을 팔기 직전 고무도장으로 그때그때 책값을 찍어넣었던 시절. 하지만 을유출판사는 아무리 물가와 종이값이 널뛰듯 하더라도 초판 정가를 고수하기로 운영방침을 정했다. ‘책은 상품과 다르다’는 생각에서 내린 결론이었다.

47년부터 장장 10년에 걸쳐 완성된 『조선말 큰사전』은 여러 우여곡절을 딛고 내놓은 개가였다. 일제에 압수당했다 어렵게 되찾은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온 조선어학회 간부의 간곡한 부탁으로 출간을 결정했지만 종이가 귀하던 시절이라 사전 제작 용지조차 구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려움 끝에 1권이 나오자 이 책에 감명을 받은 한 미군 대위의 도움으로 미국 록펠러 재단의 재정 지원을 받아 완간을 하게 됐다.

을유문화사가 지금껏 펴낸 책은 7000여종에 달한다. 본격적인 통사를 지향한 『한국사』, 문고본 시대를 연 『을유문고』, 동서양의 명작을 한글로 완역한 『세계문학전집』 등 우리나라 출판계의 역사를 새로 쓴 책들도 상당수다. 한국 전쟁 중에도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50년) 등 11종의 책을 출간했다.

정 회장은 자신의 출판 신념으로 “많이 팔리는 책보다 좋은 책을 펴내야 한다”를 들었다. “베스트셀러 그런 건 애당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남이 이런저런 이유로 안 내는 책, 그러나 반드시 내야 하는 책이라고 판단하면 출판했다”면서 “그게 출판사의 진정한 책임이고 의무”라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지난달 말 책 마무리를 끝낸 뒤 노환으로 건강이 나빠져 현재 입원 중이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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