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구 역사 칼럼] 진짜 큰 이익 좇은 善德女王 리더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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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27면

미국이나 한국이나 여자 대통령 후보가 거론되는 시점이다. 정치에 성별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여성 통치자는 워낙 희소해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역사에는 세 명의 여왕이 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직전 선덕(善德, 재위 632~646)과 진덕(眞德, 647~653) 여왕이 있었고, 멸망할 즈음 진성(眞聖, 887~894) 여왕이 있었다. 여왕은 중국에는 없는 존재라 주목을 많이 받았지만, 정작 이들의 통치 능력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과연 이 세 여왕이 편 정치는 어떠했을까. 적어도 선덕여왕은 정치력이 뛰어났다. 삼국을 통일한 것은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 604~661)였지만, 사실 그 기반은 선덕여왕이 다 닦아놨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 595~673)에게는 문희와 보희라는 두 여동생이 있었다. 하루는 보희가 꿈을 꾸었는데, 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산 아래가 모두 잠겼다. 보희는 이 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동생 문희에게 비단치마 하나를 받고 팔아버렸다.

문희는 이 꿈이 보통 꿈이 아니라는 걸 감지했던 것일까? 며칠 후 김유신과 김춘추가 공차기를 했는데, 유신이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서 떨어뜨렸다. 유신은 그대로 갈 수 없다며 춘추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보희는 옷고름 꿰매는 것을 거절했지만 문희는 기꺼이 했다. 몇 달 뒤, 문희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이 얘기는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 김춘추의 러브스토리로 유명하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그들의 사랑 얘기가 아니라 김유신과 선덕여왕의 협상 장면이다.

김유신은 선덕여왕이 남산으로 놀러가는 날을 택해 뜰 가운데 나무를 쌓아놓고 연기를 피우면서 문희를 태워죽이는 시늉을 했다. 멀리서 이를 본 선덕여왕은 연유를 물었다. 신하들이 “김유신이 남편도 없이 임신한 누이동생을 태워죽이려는 것”이라고 답했다. 여왕은 “누가 한 짓이냐”고 물었다. 옆에 있던 김춘추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여왕은 김춘추에게 당장 가서 책임지라고 했다. 며칠 후 혼례가 치러졌다.

짐작이 되듯이 김유신은 고의로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았다. 처음부터 문희와 김춘추를 엮어주려 했던 것이다. 왜 유신은 문희와 김춘추를 엮고, 또 그 사실을 여왕에게 알리고자 했을까? 그것은 신라 핵심층에의 진입 열망이다. 유신은 가야 출신이다. 아버지 때부터 신라로 와서 진골(眞骨)에 편입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완전한 신라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유신은 신라의 진정한 주류, 즉 성골(聖骨)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혼인만큼 좋은 것이 있을까?

김유신의 ‘쇼’는 그래서 시작됐다. ‘수준 있는 쇼’였다. 아무리 한쪽에서 멋진 공연을 해도 상대방이 알아봐주지 않으면 허망한 일이다. 선덕여왕은 유신의 의도를 읽고 받아들였다. 여왕은 왜 유신을 받아들였을까. 여왕 역시 왕으로서의 입지가 약했다. 자기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렇다 해도 가야 출신을 측근으로 삼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협상카드를 내밀 줄 아는 사람이라면 고려해볼 만하지 않을까. 더구나 김유신을 얻으면 김춘추는 저절로 따라오게 돼있지 않은가.

선덕여왕에게는 꿈이 있었다. 황룡사 9층탑. 이것은 그냥 탑이 아니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등을 상징했다. 9층은 온 세상을 뜻하는 9주(九州)의 다른 말이다. 여왕이 황룡사 9층탑을 세운 것은 이 세상을 한번 아울러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천하 통치의 꿈이다. 이런 포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덕여왕은 김유신과 김춘추의 자잘한 문제점을 접고 그들과 크게 타협할 수 있었다. 여왕은 무엇이 진짜 이익이 되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흔히 정치인에게 이익만 좇지 말라고 말한다. 차라리 이 말이 더 나을 듯싶다. “이익을 좇아라. 다만 진짜 큰 이익을 좇아라.” 여자 대통령이든 남자 대통령이든 뭐가 큰 이익인지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