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리 유적 반드시 보존해야-개래 크로포드<가 토론토대 교수·고대 농경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미사리 선사유적지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밭터가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농경유적지로 평가(중앙일보 7일자 보도)됨에 따라 이 유적지의 보존 문제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유적발굴에 업저버로 참가했던 개리 크로포드교수(캐나다 토론토대)의 보존을 주장하는 글을 받아 싣는다. <편집자주>
최근 발굴된 미사리 농경유적지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의 보존여부에 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이 정도로 중요한 유적을 보존하지 않으면 무엇을 보존해야할 것인지 반문하고 싶을 정도다. 한국 내에서도 보존문제로 논의가 많은 모양이지만 어떠한 보존 대책을 세울 것이냐에 우선 초점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이렇게 강한 제언을 하는 것은 학자로서의 양심 때문임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곳을 고대 생활문화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일종의 역사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역사공원의 조성은 미사리를 동아시아 고대 농경연구의 중심지로 만들어줄 뿐 아니라 젊은 세대를 위한 교육의 양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학계·관계 등이 중지를 모은다면 보존대책은 여러 가지로 가능할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도 1956년에 발굴된 도로(등려)유적을 애초에는 대단치 않게 생각해 긴급 구제발굴 정도로 마감하려 했다가 야요이 시대(한국의 청동시대에 해당)의 농경유적·가옥 터 등이 속속 발견되자 완전보존으로 방침을 바꾼 적이 있다.
이에 비해 가장 오래된 쌀이 발견된 중국 양자강 유역의 하모도 유적은 중국 고고학계의 보존 미숙으로 인해 지금은 탄화된 쌀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미사리 유적에서 백제시대 밭터가 발견된 것은 가위 획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건이다. 이것은 본인이 업저버로 발굴 및 연구에 참가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이 분야를 전공하면서 그 동안 동아시아 여러 곳에서 논농사 유적은 많이 보았지만 밭농사 흔적이 이렇게 뚜렷하게 나타난 유적은 미사리가 처음이고 과문 탓이 아니라면 사실상 처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또한 여러 시대에 걸쳐서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도 미사리 유적지는 주목할 만하다.
신석기에서 초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유적이 여러 층위를 통해 일목요연하게 드러난 점은 유례가 드물다.
10일간의 한국 방문기간 중 미사리를 비롯해 김포 가현리 등 한강유역의 주요 선사 유적도 둘러보았다. 이 과정들을 통해 한강유역이 고대 한·중·일 문화교류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이번 방한의 최대 수확이었다.
일본학계에서는 벼농사가 중국에서 일본으로 직접 전래되었다는 학설을 아직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일부 남아있다.
일본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벼가 대략 BC8백년경의 것인 점을 보아도 직접 도래설은 대단히 근거가 빈약한 학설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