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세계 1위 조선업의 힘 … 달라진 그들의 머리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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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의 82m 높이 골리앗 크레인은 그대로였다. 1990년 4월 120명의 노조원이 올라가 13일 동안 농성하면서 '골리앗 투쟁'을 벌였던 곳이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올 5월 말. 이 크레인은 3년치 물량을 소화하느라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또 다른 골리앗 투쟁의 장소였던 대우조선해양의 경남 거제 옥포조선소. 80년대 말 노조원의 분신이 잇따르며 강성 노조의 대명사였던 이곳도 넘쳐나는 수주 물량을 해소하느라 정신이 없다. 한국 조선업이 세계 조선업계 1위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뒤에는 노조의 변신도 한몫 하고 있었다.

◆'회사 없이는 노조도 없다'=현대중 김종욱 경영지원본부 상무는 "조선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노조원의 기대치도 자꾸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영업이익의 0.4%와 1%를 각각 사내 근로복지기금과 노조 발전기금으로 내놓으라는 제안이 그런 예다.

하지만 김 상무는 "과거와 달리 대화와 타협의 길이 열려 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조선업 호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기에 노조로서도 회사의 미래를 뒤흔들 만큼의 요구는 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 강경 투쟁 일변도였던 노조의 변화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됐다. 유상구 노조 사무국장은 "우리 노조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복지 노조를 표방하고 있다"고 말했다. 명분 없는 정치투쟁보다 노조원의 실리 챙기기가 우선이라는 이야기다.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 국제적 감각을 기르기 위한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말에는 노조원 8명과 사측에서 2명이 함께 미국 디트로이트를 방문했다. 산업시설이 문을 닫고 유령 도시로 전락한 디트로이트에서 이들은 노사 평화의 중요성을 몸으로 느꼈다. 현대중 노조는 4월에도 세계 1위의 자동차 업체인 일본 도요타 노조를 방문, 상호 교류를 갖기로 합의했다. 이번 가을께 도요타 노조 간부들이 울산 현장을 방문할 계획이다.

◆외국 선주까지 챙기는 노조위원장=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내 이세종 노조위원장실을 찾아가자 이 위원장은 외국 선주들이 보내 온 편지 한 묶음을 보여줬다. 이 위원장은 당선 이후 3년째 100여 명의 외국 선주에게 '대우조선해양을 도와줘서 고맙다. 선주들이 제때 선박을 인도받을 수 있도록 노조가 최선을 다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에 감동한 외국 선주들이 보내온 답장들이었다.

"계약식 자리에서 외국 선주로부터 '당신네 기술은 인정하지만 노조가 강성이라서 계약을 주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위원장은 사측과 함께 조인식에 참여해 외국 선주들에게 바뀐 노조의 자세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2001년 대우조선이 대우 계열사 가운데 가장 먼저 워크아웃을 졸업하는 데에는 노동자의 역할이 컸다"며 "매달 경영회의에 참석하는 등 회사의 경영에 적극 협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울산.거제=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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