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고난도<高難度>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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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천하를 손에 쥔 뒤 가장 중용한 사람은 가신 소하(蕭何)였다. 후방에 남아 군자금과 보급물자를 마련해 전선으로 공급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공신 서열에서 앞자리를 소하에게 뺏긴 장군들이 유방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어찌하여 수십 차례 싸움터에 몸을 던진 사람보다 후방에서 문서만 만지작거린 소하의 공을 더 높이 평가하십니까."

유방의 답변은 명쾌했다. "너희의 공은 사냥감을 쫓는 사냥개의 공에 불과하다. 소하의 공적이야말로 사냥개의 줄을 당기고 푸는, 사람의 공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제대로 된 논공행상(論功行賞)의 본보기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사례다. 골 넣는 선수에게만 환호할 게 아니라 빛을 보기 어려운 포지션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한 나머지 선수들을 더 치켜세워야 축구 팀이 산다는 얘기다. 하지만 동서고금의 논공행상은 그와 반대이기 십상이어서 겉으로 드러나는 공을 세운 사람이 인사권자의 눈에 띄어 발탁되기 쉬운 법이다. 모든 지도자가 유방과 같은 영웅이 될 순 없는 법이다.

유방과 같은 발탁 인사를 못하고 정실에 치우친 인사를 했다고 치자. 그래도 반드시 지켜야 할 철칙이 한 가지 있다. 손에 든 카드가 신통치 않아도 버릴 카드를 잘 골라 버리기만 하면 큰 낭패는 면할 수 있다. 화투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사도 마찬가지다. 잘못 뽑은 사람이란 판단이 들었는데도 때를 놓쳤다간 더욱 큰 화가 인사권자에게 닥친다. 하지만 그런 판단력과 행동력을 갖추기도 그리 녹록지 않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이란 말을 세인들이 오래 기억하는 것은 그만큼 실천이 어렵기 때문이다.

정치자금 추문에 휩싸인 일본의 한 현직 각료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두고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는 대체로 이 같은 골자다. 당사자는 자신을 발탁해 준 리더의 짐을 덜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돌아가는 모양새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남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눈을 돌려 한국의 권부를 봐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느낌이다. 스스로를 사육신에 비유했다가 후손들로부터 사육신 모독 혐의를 받는 사람까지 나오는 판국이다. 드러나지 않게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아니 있기나 한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쓸 사람 쓰고 버릴 사람 버리는 게 인사의 기본이라지만 그게 말처럼 어디 쉬운 일이던가. 오늘도 반면교사를 통해 그 어려움을 또 한번 실감한다.

예영준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