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4. 역마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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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서울 능동에 있었던 군자리 골프장(현 어린이대공원) 1번 홀의 모습. 한씨는 어린시절 이 골프장 1번 코스가 내려다 보이는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사진=대한골프협회]

나는 일제 강점기인 1938년 3월 28일 서울 을지로 6가에서 아버지 한일용씨와 어머니 홍승녀씨의 2남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 당시 대부분 한국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가족은 가난했다. 충청남도 보령에서 혼자 상경한 아버지는 장사로 생계를 꾸려야 했기 때문에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부족했다.

더구나 아버지는 일제의 징용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로, 강원도로 피신을 다니셨다. 어린 나 역시 자연히 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떠도는 신세가 됐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마도 내 사주에 역마살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프로골퍼 역시 방랑생활이 필수가 아닌가. 대회가 열리는 세계 곳곳을 부초처럼 돌아다녀야 하니 말이다. 70세에 이른 요즘까지 골프대회가 열리는 방방곡곡을 찾아다니고 있다. 역마살이 낀 사람이 프로골퍼가 되는 것같다.

덕분에 나는 어렸을 때 호랑이를 실제로 볼 수가 있었다.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아버지는 한때 강원도 춘천 부근 진병산에서 화전민 생활을 했다. 화전민 생활이 징용을 피하기는 안성맞춤이었다. 아주 깊은 산속에서 밭을 일궈 옥수수, 조 등을 심어 생활했다. 오줌이 마려워 잠에서 깬 나는 소변을 보고 원두막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달이 밝아 대충 앞은 볼 수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갑자기 내 뒤에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손으로 내 입을 막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해"라고 말씀하시며 나를 원두막 안으로 밀어넣으셨다. 나는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었다. 아버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파란색 불빛 두 개가 움직였다. 송아지만한 그것은 조금씩 움직였다. 정말 무서웠다. 한참 시간이 흘러 불빛이 사라진 뒤 아버지는 "저게 바로 호랑이야"라고 하셨다. 곶감보다 더 무서운 호랑이를 나는 그때 처음 보았다.

광복 직전 우리 가족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왕십리 쪽에 다시 자리를 잡은 우리 가족이 겨우 안정을 찾아가려는 무렵 한국전쟁이 터졌다. 경동국민학교 6학년 때였다.

"죽더라도 고향에 가서 죽어야 한다"고 말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우리 가족은 또다시 보따리를 싸서 보령으로 피난갔다. 아직도 서울 태생인 내 말씨에 충청도 억양이 묻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그곳에서 1년 반을 보냈다. 공부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큰아버지댁에 방을 얻어 일곱 식구가 함께 살았다. 먹을 것이 없어 밀가루죽, 쑥개떡 등으로 배를 채웠다. 땔감을 구하러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는 것이 내 일이었다. 열살 차이 막내 여동생은 피난중에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잘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린 동생은 치료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9.28 서울 수복 후 나는 어머니, 형과 함께 셋이서 먼저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살자고 했지만 어머니와 형은 "서울로 다시 가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서울로 와보니 성수동에 있던 집은 불에 타 없어졌다. 그래서 화양동으로 이사를 하게됐다. 그것이 골프 인생의 계기가 됐다.

한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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