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해야 할 남북정상회담/이상우(시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남북한 정상회담과 중국 북경정부와의 수교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둘다 아주 중요한 사안이므로 깊이 생각해 결정해주기를 정부당국에 당부한다.
우선 남북한 정상회담은 지금 거론할 때가 아니다. 현재로서는 우리 대통령이 김일성을 만날 이유도 없고,또한 만날 조건도 성숙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년 12월 제5차 남북고위급(총리)회담에서 우리는 북한정부 당국자와 「화해·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했고 오는 19일에 열릴 제6차 회담에서 비준서를 교환하게 되면 이 합의는 발효하게 된다. 이 합의서의 핵심내용은 앞으로 남북한간의 교류협력과 민족동질성 회복사업,그리고 이산가족 재회 등의 절박한 문제들을 남북한 정부가 상의해 해결하자는 것이다.
○만날 조건 성숙안돼
우리는 북한동포 2천만명은 남이 아니고 우리동포며 북한영역도 우리민족의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 그리고 북한지배집단을 합법적인 독립정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평양정부가 북한주민 및 그 영역을 실제로 통치하고 있고,또한 국제사회에서 많은 나라들이 북한을 독립국가로 승인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현실을 감안해 우리의 통일과정을 협의할 당사자로 북한정권을 인정하겠다는 생각에서 「합의서」를 채택했던 것이다.
이 합의서는 앞으로 전개할 우리의 통일노력 시발점이 될 것이다. 이제 남북정부 실무자들은 이 합의를 기초로 이산가족문제,북한동포의 삶의 질을 높이는 문제 등을 풀어갈 구체적 협의를 해나가게 된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구체적 문제해결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협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때에 국가원수가 나서서 김일성을 만난다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김일성은 누구인가. 전쟁을 일으켜 죄없는 동포를 수백만명이나 죽인 장본인이다. 민간항공기를 떨어뜨려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켰고 아웅산에서 우리 정부수뇌들에 폭탄을 던져 아까운 지도자들의 목숨을 앗아간 바로 그 장본인이다. 그 김일성이 아직 자기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사과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 대통령이 만난다는 것은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국립묘지에 묻혀있는 아까운 젊은이들의 영령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50년전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만행을 지금도 용서못하는 국민들이 김일성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정상회담이 가능하려면 김일성의 사죄가 선행되어야 마땅하다.
북한당국은 합의서 채택이후 대남비난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다. 하루도 쉬지않고 욕을 해대는 김일성 정부의 총수를 평양에 찾아가 만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정상회담은 북한이 태도를 고치고 우리측에 성의를 보일때 해도 결코 결코 늦지 않다. 북한정부가 행하는 행동을 보고 이에 맞는 응분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길이지,무조건 고개숙이는 것이 화해의 길이 아니다.
○남침사죄 먼저해야
정상회담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고,또한 조건도 성숙되지 않았다. 당분간 거론하지 말아야 한다.
북경정부와의 수교도 잘 생각해야 한다. 탈냉전시대에 우리만이 냉전시대의 외교를 고집해서는 안되고,또한 이웃나라와의 관계개선은 바람직한 것이므로 북경정부와 수교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사리에 맞도록 해야 한다.
북경정부는 우리와의 수교조건으로 한국과 중화민국의 단교를 요청하는 모양이나 이를 들어주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첫째,우리가 북경정부와의 수교조건으로 북경정부와 평양정부간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간의 특수관계를 우리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북경정부에 한국과 중화민국간의 특수관계를 존중해줄 것을 요구해야 한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타이베이와의 관계를 재조정한다는 것은 외교적 굴복이나 다름없다.
둘째,미국과 일본이 북경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단교했던 선례를 드는 모양이나 그것는 냉전시대의 불가피했던 상황이지,탈냉전의 화해시대에 꼭 따라야할 원칙이 아니다. 이번 기회에 두개의 중국 모두를 승인하는 새로운 선례를 만들어 국제사회에 현실중시의 새 전통을 만들어야 한다.
나라와 나라사이에도 개인과 개인사이에서처럼 의리가 존중되어야 한다. 우리가 항일독립운동을 하던 어려운 시기에 우리의 임시정부를 돕고 우리의 광복군을 돕던 중화민국을 희생시킨다면 국제사회에서 우리 대한민국을 「의리도 모르는 나라」라고 하지 않겠는가.
○대중 수교도 천천히
무슨 정책이든 그 정책이 바로 되려면 몇개의 기본원칙을 충실히 반영해야 한다.
첫째로 꼭 필요한 정책인가를 따져야 하고,둘째로 해도 좋은 일인가를 확인해야 하고,셋째로 할 수 있는 일인가를 알아보아야 하고,넷째로 생겨날 수 있는 부작용을 감당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하고,다섯째로 바른 절차를 거쳐 정책이 마련되었는가를 검토해야 한다.
지금 거론되고 있는 대북한정책과 대중국정책은 위에 열거한 원칙에 비춰 재고하기 바란다. 떳떳하고 당당한 정책을 줄기차게 밀고나가는 정부가 나라 안팎에서 칭찬받는 정부다.
우리 정부가 칭찬받는 정부가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문제를 제기해 본다.<서강대교수·정치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