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우려에 동조했던 김재규, 박정희 암살 한 달 전 만난 남자

  • 카드 발행 일시2024.04.09

<제1부> 궁정동의 총소리

6회. 한·미 갈등의 약한 고리 김재규

정상회담은 잘 짜여진 약속대련이다. 그런데 1979년 6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은 약속 따윈 존중되지 않은 최악의 정상회담이었다. 한국의 최고권력자 박정희는 미국 대통령까지 가르치려 들었다.

아슬아슬했던 한·미 정상회담

1979년 6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만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카터 대통령과 축배를 하고 있다. 이날 오전 살벌한 정상회담을 했으나 오후 들어 협상이 타결되는 바람에 만찬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중앙포토

1979년 6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만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카터 대통령과 축배를 하고 있다. 이날 오전 살벌한 정상회담을 했으나 오후 들어 협상이 타결되는 바람에 만찬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중앙포토

당시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 회고록에 따르면, 어렵사리 카터 대통령의 철군 결심을 바꿔놓은 미국 외교관들은 박정희가 정상회담에서 카터를 자극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일찍부터 한국 측에 ‘박정희가 철군 관련 언급을 자제해 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회담장에서 직접 작성한 육필 원고를 꺼내더니 무려 45분간 안보 강의를 했다. 주한미군은 북한만 아니라 중국과 소련 등으로부터 한국과 일본, 나아가 미국까지 지키는 보루라는 요지다. 따라서 주한미군 철수는 어리석은 결정이란 결론이었다.

카터 대통령이 예상치 못했던 강의에 화가 난 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떨기 시작했다. 배석했던 밴스 국무장관에게 메모를 전달했다.

박정희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주한미군을 전원 철수시키겠다.

그리고 카터는 당초 예정됐던 ‘철군 중단’ 약속을 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원하던 말을 않는 대신 박정희가 가장 싫어하는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서 ‘긴급조치 9호 해제’를 요구했다.

카터는 회담을 끝내고 미국대사 관저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폭발했다.
카터는 자신의 리무진에 밴스 국무장관과 브레진스키 보좌관, 그리고 글라이스틴 대사를 같이 태웠다. 차를 타자마자 글라이스틴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삿대질까지 하면서 ‘철군을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
리무진이 대사관저에 도착해서도 카터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글라이스틴을 몰아세웠다. 밴스 국무장관이 글라이스틴 편을 들었다.

직속 상관의 지원을 받은 글라이스틴은 용기를 내 카터에게 단도직입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