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택연금 DJ ‘깜짝 외출’ 뒤엔, 박정희 미워하는 카터 있었다

  • 카드 발행 일시2024.04.02

<제1부> 궁정동의 총소리

5회. 보이지 않는 손, 미국

해방 후 한반도의 명운을 좌우한 결정적 변수는 미국이다. 한·미 관계의 핵심 이슈는 주한미군 철수다. 박정희 대통령 말년의 한·미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난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61년 11월11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방미는 그의 좌익경력에 대한 미국의 의혹을 해소하는 첫 계기였다. 11월 14일 방미중 백악관을 방문해 케네디대통령의 영접을 받고 있는 박의장.

61년 11월11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방미는 그의 좌익경력에 대한 미국의 의혹을 해소하는 첫 계기였다. 11월 14일 방미중 백악관을 방문해 케네디대통령의 영접을 받고 있는 박의장.

박정희는 미국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박정희는 5·16 이틀 후인 18일 용산 8군 영내에 있는 주한미군사령관 특별보좌관인 하우스만(James Hausman)을 찾아갔다. 사실 박정희는 쿠데타 당일부터 하우스만을 만나고자 연락관을 보냈으며, 만남이 이뤄지기까지 이틀 동안 연락관을 통해 하우스만과 소통하고 있었다.

“공산당 연루 혐의로 체포됐지만, 나는 사실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박정희는 6·25 직전 군내 좌익 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아픈 과거를 스스로 꺼냈다. 미국이 5·16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공산주의자 경력은 미국 입장에서 5·16을 의심하게 만드는 결정적 포인트였다.

하우스만은 박정희의 말을 가로막았다.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하우스만은 6·25전쟁 전부터 박정희를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박정희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당시 구명운동을 했던 장본인이다.
하우스만은 ‘한국군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도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1946년 대위 시절 한국에 파견돼 한국군(조선국방경비대) 창설을 주도했다. 한국군을 가장 잘 아는 미국인 하우스만은 1980년대까지 미군 사령관 고문으로 근무하면서 한·미 관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우스만, 나를 위해 미국에 좀 갔다 오지 않겠소?”
박정희는 미국의 승인을 받고 싶었다. 당시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은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았다. 무력진압을 공언했다.
쿠데타에 성공했지만 주체세력들은 ‘역(逆)쿠데타’ 가능성에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본토에서도 국방부와 국무부, 합참 등에서 쿠데타 대응방안을 두고 설왕설래하던 상황이었다.

박정희의 요청을 받은 하우스만은 곧장 미국으로 건너가 합참의장 등 고위 관계자들을 만나 박정희와 5·16을 변호했다. 미국은 박정희의 사상에 대한 의심을 풀었고, 5·16을 인정했다.
그 최종 승인 절차가 1961년 11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회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