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을선 남자가 사라졌다…제주 함덕 해변 몰랐던 비극

  • 카드 발행 일시2024.04.03

제주 4·3 관광지도 

먼 옛날 초등학교 사회 시간을 기억한다. 제주도 지도를 펼쳐 놓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제주도에는 해안을 따라 마을이 형성됐어요. 내륙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어요. 식수가 부족했거든요. 지하로 흐르는 물이 해안에 이르러 솟았고, 그래서 사람들이 해안에 모여 살았어요.”

아주 긴 세월, 그런 줄만 알고 살았다. 여행기자가 되고, 제주도를 100번 넘게 가고, 올레길 걷고 한라산 자락을 어슬렁대다 오래전 선생님 말씀이 틀리다는 것을 알았다. 한라산 아랫도리, 그러니까 ‘중산간’이라 불리는 제주 내륙 지역에도 사람이 살았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중산간 들녘에도 160개가 넘는 마을이 있었다. 해안 마을보다 물은 귀했지만, 마을 이루고 돌밭 일구며 옹기종기 살았다. 160개가 넘었다는 마을들은 그러나 70여 년 전 갑자기 사라졌다. 정확히 말해 불타 없어졌다. 그렇게 제주 4·3은, ‘육지것’ 여행기자에게 미스터리로 다가왔다. 어쩌다 그 많은 마을은 순식간에 사라졌을까.

제주 사람과 친해졌다 싶으면 4·3에 관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할망은 어떻게 살아남았느냐고. 그러나 4·3 얘기만 나오면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70년도 지난 일인데 딱딱하게 굳은 낯빛으로 육지것에 경계의 눈빛을 쏘고 돌아앉았다. 그때 분명히 들었다. 겨우 풀렸던 할망의 마음이 다시 닫히는 소리를. 돌아앉은 할망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4·3은, 그렇게 또 멀어졌다.

물빛 고운 제주 함덕 해변. 제주도를 대표하는 해수욕장인 이곳이 4·3 유적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제주도 관광지 대부분은 4·3의 상처를 안고 있다. 손민호 기자

물빛 고운 제주 함덕 해변. 제주도를 대표하는 해수욕장인 이곳이 4·3 유적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제주도 관광지 대부분은 4·3의 상처를 안고 있다. 손민호 기자

제주도 여행기사를 쓰면서 4·3을 언급하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제주도 전역이 4·3 유적지여서다. 제주도를 드나들수록 4·3 유적지가 늘어났다. 봄에는 유채꽃 흐드러지고 가을에는 억새 춤추는 중산간 들판이, 고운 모래 반짝이는 조천과 성산과 표선의 해변이, 명승지로 꼽힌 서귀포의 폭포가, 섬에 하나뿐인 공항이 학살의 현장이었다는 참담한 진실을 짊어지고 육지것 여행기자는 제주 여행기사를 썼다. 외면할 수는 없었다. 여행은, 나의 일상에서 당신의 일상으로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육지것이 섬사람과 같은 숨을 쉬는 일이어서다.

제주 4·3 유적지를 제주 관광지도에 새겼다. 지도를 그리다 알았다. 4·3 유적지 대부분이 유명 관광지 곁에 있었다. 사연을 숨긴 관광명소도 허다했다. ‘유적지 옆 관광지’라는 표현이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그래도 고집한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에는 슬픔이 배었다는 걸 알아서다. 오늘은 행정안전부가 정한 제76주기 4·3 희생자 추념일이다.

🕵️ 제주 4·3 사건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2000년 제정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주 4·3 특별법)’이 내린 ‘제주 4·3 사건’의 정의다. 특별법 정의를 다시 보면, 제주 4·3은 무려 7년 6개월 하고도 21일간 이어졌다. 일개 사건이 아니었다. 사건 내용도 단순하지 않다. ‘소요’ ‘무력충돌’ ‘진압’ 그리고 ‘희생’까지 4개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모든 사건의 총합이 제주 4·3이다.

제주 4·3평화공원 위령제단에 모셔진 4·3 희생자 위패. 손민호 기자

제주 4·3평화공원 위령제단에 모셔진 4·3 희생자 위패. 손민호 기자

특별법이 언급한 날짜들을 되짚어 보자. 1947년 3월 1일은 3·1절 기념식이 끝난 뒤 열린 집회를 경찰이 무력으로 진압한 날이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숨졌고 8명이 다쳤다. 1948년 4월 3일은 남로당 무장대 350여 명이 새벽 2시를 기해 12개 지서를 공격하고 우익단체 요인을 공격한 날이다. 무장대의 기습 공격으로 경찰 4명과 민간인 8명이 숨졌고 무장대도 2명이 사망했다. 1954년 9월 21일은 한라산 출입금지가 해제된 날이다. 한라산이 열리면서 제주 4·3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한라산은 1948년 10월 17일 군경이 제주 해안에서 5㎞ 이상 떨어진 지역에 통행금지를 명령한 이후 출입이 막혀 있었다.

제주 4·3의 결정적인 변곡점이 되는 날은 사실 1948년 10월 17일이다. 제주 해안에서 5㎞ 너머를 모두 비우라는 ‘소개령’이 발동된 이후 사태가 급변했다. 소개령 이전의 4·3이 군경이 중심인 토벌대와 좌익 세력인 무장대의 무력충돌이었다면, 소개령 이후의 4·3은 토벌대가 제주 도민을 일방적으로 죽인 참사에 가깝다. 소개령 이후 토벌대는 마을이 보이는 대로 불태웠고, 사람이 보이는 대로 죽였다.

제주 4·3에 관한 정부의 유일한 공식기록인 ‘제주 4·3 진상조사 보고서(2003)’는 1948년 당시 제주 인구의 9분의 1 수준인 2만5000∼3만명이 제주 4·3으로 희생됐다고 추정한다. 희생자의 33%가 어린이·노인·여성이었으며, 희생자의 86%가 토벌대에 의해 발생했다. 토벌대 전사자는 320명으로 집계됐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 도민에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힌 까닭이다.

그런데도 이 아픈 역사는 무장대의 습격 사건이 발발한 날짜, 즉 1948년 4월 3일로 기억된다. 반정부세력의 도발로 비롯된 사건이라는 속뜻이 읽힌다. 한동안 제주 4·3은 ‘폭동’으로 불렸다. ‘항쟁’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공식 명칭은 ‘사건’으로 정리됐다. 그러나 제주도의 정서는 다르다. ‘사건’을 빼고 그냥 제주 4·3이라고 한다. 제주 4·3평화재단, 제주 4·3평화공원 등 공식기관도 ‘사건’을 붙이지 않는다. 이번에도 여행기자는 ‘로컬 룰’을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