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망치 들고 병원 차렸다…IT 수퍼맨 ‘나무 의사’ 환승기

  • 카드 발행 일시2024.03.13

‘환승직업’

푸르렀던 20대 꿈과 성공을 좇아 선택한 직업도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정신없이 달리다 20년, 30년 지나면 떠날 때가 다가오죠.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닥쳤든, 몸과 마음이 지쳤든, 더는 재미가 없든, 회사가 필요로 하지 않든…오래 한 일을 그만둔 이유는 사실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내가 하고 싶은 일, 즐길 수 있는 일을 다시 시작할 용기입니다. ‘환승직업’은 기존 직업과 정반대의 업(業)에 도전한 4050들의 전직 이야기입니다. 고소득, 안정된 직장이란 인생 첫 직업의 기준과 다르게 ‘더 많은 땀과 느린 속도’의 직업을 선택한 이유를 소개합니다. 이 직업에 관해 궁금한 모든 것, ‘A to Z 직업소개서’와 ‘전문가 검증평가서’까지 중앙일보의 프리미엄 디지털 구독 서비스 ‘더중앙플러스(The JoongAng Plus)’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주목인데, 천년 주목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요 잎이 파랗지 않고 약간 누리끼리한 건 나무 진드기 응애 때문이에요. 그 옆에가 배롱나무인데 추위에 약해서….

말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나무에 대해 얘기하는 이승언(53)씨의 입은 속사포였다. 별천지도 아니고, 수목원에서도 아니다. 경기 성남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에서다. 느티나무에 왕벚나무에 아파트 한 단지에서만 서로 다른 나무가 이렇게나 많다니. 이씨는 갓 태어난 아이의 손가락을 받치듯 조심스럽게 이파리를 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이제 곧 있으면 얘가 히어리 꽃을 피울 텐데 엄청 예뻐요. 꽃뿐만이 아니라 잎도요.”

나무의사 이승언씨가 2월 19일 경기 성남 소재 한 아파트 단지에서 나무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 나운채·이수민 기자

나무의사 이승언씨가 2월 19일 경기 성남 소재 한 아파트 단지에서 나무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 나운채·이수민 기자

이씨가 단순한 나무 ‘오덕’은 아니다. 백의를 입은 의사이자, 병원장이다. 그런데 도구가 예사롭지 않다. 청진기 대신 뭉툭한 고무망치를 휘두른다. 메스 대신 요란한 전기톱을 쥔다. 이씨는 나무의사, 병자(病者)가 아닌 병목(病木)을 살피는 게 업(業)이다.

지금 직업보다 전 직장에 관심이 갔다. 그는 IT업계의 수퍼맨이었다. 20여 년 전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의 옛 직장은 ‘빅블루(Big blue)’란 별칭으로 유명한 한국 IBM이다. 지금으로 치면 AI업계 선두주자 엔비디아와 같이 상용 컴퓨터 시대를 열었던 그 글로벌 대기업 맞다.

최첨단 기술에서 자연으로. 다소 생뚱맞은 그의 ‘직업 환승’은 어쩌다 이뤄진 것일까. 나무의사라는 직업엔 무슨 매력이 있을까. 연봉은 많을까,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을까, 하는 일은 뭘까. 그 모든 것을 ‘환승직업’에서 한 번에 소개한다. 나무의사의 모든 것, A to Z 직업소개서와 8곳의 직업·전업 전문가들이 6개 지표로 평가한 결과도 함께 공개한다.

📃목차

1. 나무의사의 왕진 현장
2. IMF 때 입사 연기…IT에서의 20년
3. 나무의사 고시생 준비
4. 인턴에서 나무병원장으로

1. 나무의사의 왕진 현장

지난 2월 19일, 이씨의 ‘왕진’ 현장을 따라다녔다. 왕진은 나무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씨는 한 나무줄기에 난 상처를 보기만 했는데, 단번에 진단을 내렸다. “이건 피소(皮燒) 피해를 입은 겁니다. 특정 부분에만 햇볕을 강하게 쬐다 보니, 이렇게 껍질이 데서 갈라진 거죠.”

이씨는 고무망치로 나무를 두들겼다. 사람의 상태가 어떤지 알기 위해 의사가 청진기를 대듯 나무의사는 망치를 든다. 나무를 두들겨 나는 소리로 속이 썩어 빈 곳이 있는지, 줄기는 튼튼한지를 알기 위해서다. 병원의 CT·MRI처럼 첨단 장비도 동원한다. 바늘같이 뾰족한 장치를 줄기에 꽂아 전류를 흘려보내서 나무의 활력 정도를 측정하는 ‘TS(Tree & Soil) 미터’ 장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