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은 호텔 나이트를 남겼고, 평창올림픽은 이 길 남겼다

  • 카드 발행 일시2024.02.14

올림픽 레거시 

오늘은 퀴즈로 시작해 볼까요? 다음에 열거하는 것들의 공통점을 아십니까. 더 포인트, 오킴스, 파라오, 바비 런던. 잘 모르시겠다고요. 그럼 ‘제이제이 마호니스’는요? 이제야 아시겠다고요? 네, 맞습니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서울 특급호텔 나이트클럽입니다. 더 포인트는 신라호텔, 오킴스는 조선호텔, 파라오는 힐튼호텔, 바비 런던은 롯데호텔의 나이트클럽이었지요. 다 문을 닫았고, 하얏트호텔의 제이제이 마호니스만 영업 중이지요.

이들 나이트클럽에는 공통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88 서울올림픽이 낳은 올림픽 레거시(Olympic Legacy)입니다. 호텔 나이트클럽하고 88올림픽하고 무슨 상관이냐고요? 옛날이야기 한 토막 들려드리지요. 88올림픽 개막을 앞둔 1988년 초, 한국전쟁 이후 가장 많은 외국인의 방한이 예상되자 노태우 정부는 서울 시내 특급호텔에 다급한 지시를 내립니다. “올림픽 개막 전까지 외국인 손님이 밤에 즐길 수 있는 명소를 만들어라.” 나라님의 명령을 받든 특급호텔들이 부랴부랴 지하에 클럽을 들이거나 식당을 클럽으로 개조했다지요. 88올림픽 이후 특급호텔 나이트클럽은 서울을 대표하는 나이트 투어 명소가 됐고요.

88올림픽으로 제이제이 마호니스가 생겼다면, 2002 한일월드컵은 템플스테이를 낳았습니다. 월드컵 기간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에게 한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숙소를 제공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논의 끝에 사찰을 숙소로 개방하는 방안이 채택되었습니다. 그게 템플스테이입니다. 지금은 100개가 넘는 전국 사찰에서 템플스테이를 운영 중이지만, 처음엔 33개 사찰만 참여했었지요.

메가 이벤트는 이렇게 뜻밖의 관광 자원을, 나아가 후대에 길이 전해지는 유산을 남깁니다. 올림픽이 남긴 유산은 콕 집어 올림픽 레거시라 하지요. 2018 평창 겨울올림픽은 무엇을 남겼을까요? 제일 먼저 ‘강릉 르네상스’가 떠오릅니다. 쇠락한 동해안 관광지로 잊혀가던 강릉이 평창올림픽 이후 전국에서 제일 핫한 명소로 거듭났지요. 요즘에도 주말에는 빈방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강릉 르네상스는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단축된 거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KTX는 물론이고, 광주원주고속도로와 서울양양고속도로가 잇따라 완전 개통하면서 강릉이 확 가까워졌지요.

올림픽 아리바우길 

올림픽 아리바우길 5코스 안반데기의 초겨울 새벽 풍경. 올림픽 아리바우길은 평창올림픽 공식 트레일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올림픽 아리바우길 5코스 안반데기의 초겨울 새벽 풍경. 올림픽 아리바우길은 평창올림픽 공식 트레일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평창올림픽이 낳은 유산은 하나 더 있습니다. 평창올림픽 공식 트레일 ‘올림픽 아리바우길’입니다. 올림픽 아리바우길은 평창올림픽이 열린 강원도의 세 고장, 그러니까 정선과 평창 그리고 강릉을 잇는 131.7㎞ 길이의 장거리 트레일입니다. 정선 아리랑시장(정선오일장)에서 시작해 아우라지~노추산~안반데기~대관령~대관령옛길~경포호수를 지나 강문 해변에서 끝을 맺습니다.

모두 9개 코스로 이루어진 올림픽 아리바우길은 강원도의 산과 강, 들과 산, 바다와 호수, 시장과 유적을 구석구석 헤집습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정선아리랑, 강릉단오제)도 두 개 거느리고, 한반도의 등뼈 백두대간과 붉은 해 토해 내는 동해 바다도 품습니다. 올림픽 아리바우길 코스를 개척한 ㈔강릉바우길의 이기호 사무국장은 “제주올레가 걷기여행 초보자를 위한 길이면 올림픽 아리바우길은 중급자를 위한 길”이라고 소개합니다. 9개 코스 중에서 20.5㎞ 길이의 2코스가 가장 길며, 해발 1322m의 노추산을 올랐다 내려오는 3코스가 가장 험합니다.

아리바우길 전체 코스 지도. 정선 아리랑시장에서 시작한 길이 백두대간을 넘고 대관령옛길을 지나 강릉 강문 해변에서 끝을 맺는다.

아리바우길 전체 코스 지도. 정선 아리랑시장에서 시작한 길이 백두대간을 넘고 대관령옛길을 지나 강릉 강문 해변에서 끝을 맺는다.

‘올림픽 아리바우길’이라는 이름은 올림픽이 열린 세 고장에서 비롯됐습니다. ‘올림픽’은 평창을 가리키며 ‘아리’는 정선아리랑의 고장 정선을 상징하고, ‘바우길’은 강릉의 대표 트레일 ‘강릉바우길’에서 따왔습니다. 트레일 이름에 ‘올림픽’을 쓰기 위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승인도 받아냈지요. 올림픽 아리바우길 조성에 예산 33억원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올림픽 아리바우길은 잊혔습니다. 2018년 도종환 당시 문체부 장관도 “올림픽 아리바우길은 올림픽 기간에는 모두가 즐기는 관광자원이 되고 올림픽이 끝난 뒤에는 올림픽 유산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자신했습니다만, 올림픽이 끝나자 문체부도, 강원도도, 길이 지나는 세 고장도 외면했습니다. 길은 만드는 것보다 운영하고 관리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한데,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지방정부도 나 몰라라 손을 놨습니다.

올림픽 아리바우길 상징. 올림픽이 열린 강원도를 상징하는 새 두루미를 형상화했고, 오륜기에 쓰이는 다섯 가지 색깔을 입혔다.

올림픽 아리바우길 상징. 올림픽이 열린 강원도를 상징하는 새 두루미를 형상화했고, 오륜기에 쓰이는 다섯 가지 색깔을 입혔다.

올림픽 아리바우길 가이드북 

올림픽 아리바우길 전경. 하늘에서 내려다본 풍경이다. 왼쪽 아래가 정선, 오른쪽 위가 강릉이다. 9개 구간을 다른 색으로 표시했다. 가운데 눈을 덮고 누운 산이 안반데기다. 이 그림은 올림픽 아리바우길 공식 가이드북 표지로 쓰였다. 안충기 기자ㆍ화가

올림픽 아리바우길 전경. 하늘에서 내려다본 풍경이다. 왼쪽 아래가 정선, 오른쪽 위가 강릉이다. 9개 구간을 다른 색으로 표시했다. 가운데 눈을 덮고 누운 산이 안반데기다. 이 그림은 올림픽 아리바우길 공식 가이드북 표지로 쓰였다. 안충기 기자ㆍ화가

올림픽 아리바우길이 잊힐 줄만 알았는데,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강원관광재단이 올림픽 아리바우길에서 걷기여행 행사를 하고 있답니다. 알아보니 강릉시가 관광거점도시 예산 중 일부를 지원해 강원관광재단이 2022년과 2023년 서너 차례 행사를 치렀더군요.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몇 차례 이벤트만 열었을 뿐, 안내 체계와 운영 관리는 여전히 허술하더군요. 막상 올림픽 아리바우길 코스 지도를 제공하는 웹사이트 하나 없습니다. 강릉여행안내센터 ‘강릉수월래’에 가면 종이지도는 받을 수 있더군요.

2019년 개최한 올림픽 아리바우길 걷기 축제 마지막 날 장면. 강릉 강문 해변에서 131.7㎞ 올림픽 아리바우길 9개 코스를 완주하는 대장정이 마무리됐다. 손민호 기자

2019년 개최한 올림픽 아리바우길 걷기 축제 마지막 날 장면. 강릉 강문 해변에서 131.7㎞ 올림픽 아리바우길 9개 코스를 완주하는 대장정이 마무리됐다. 손민호 기자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올림픽 아리바우길 올 가이드. 일타강사는 2017년 올림픽 아리바우길 공식 가이드북을 제작한 바 있습니다. 가이드북 만든다고 3개월을 강원도에서 살다시피 했었지요. 일타강사는 문체부와 공동으로 한·중·일 3개 언어로 된 100쪽 분량의 가이드북을 제작했고, 가이드북은 평창미디어센터·김포공항 등에 배포됐었습니다. 아, 평창올림픽에 초청된 VIP 손님에게도 선물로 드렸었네요.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의 딸이자 백악관 고문이었던 이방카 트럼프가 가이드북 선물세트를 받고 좋아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습니다. 2019년에는 올림픽 아리바우길 전 코스에서 걷기 축제를 진행한 적도 있습니다. 중앙일보 독자 210명을 초청해 9개 코스 131.7㎞를 3주일간 나누어 걸었지요. 그때 함께 걸었던 인연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올림픽 아리바우길은 IOC가 인정한 유일한 올림픽 트레일입니다.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영서와 영동으로 갈라진 세 고장이 올림픽 아리바우길로 이어졌습니다. 올림픽 아리바우길의 의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세상을 하나로 잇는다는 점에서 올림픽 아리바우길은 올림픽을 닮은 길입니다.

최근에 다시 현장을 확인하니 길은 그대로였습니다. 관리가 덜 된 구간도 있지만, 길이 막혔거나 사라진 구간은 없었습니다. 대신 주변 식당이나 숙소는 바뀐 게 꽤 있더군요. 그래서 길 정보 중심으로 올림픽 아리바우길을 소개하고, 전체 9개 코스의 코스별 상세지도를 제공합니다. 일타강사가 걷고 또 걸으며 일일이 점 찍은 자식 같은 지도입니다. 마침 6년 전 이맘때 평창올림픽(2018년 2월 9~25일)이 열렸습니다. 올림픽 유산은 지키고 이어나가는 것입니다.

중앙일보에서 제작한 올림픽 아리바우길 공식 홍보 영상. 
중앙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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