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 본관서 “야, 박정희 나와”…경호실장 술주정에 뜻밖 대응 (76)

  • 카드 발행 일시2024.01.15

박정희 대통령을 동작동 국립묘지에 모셔놓고 나니 생전에 대통령이 남긴 인간적 향기가 나를 휩싸안았다. 그는 18년 권력자였지만 본색은 혁명가였다. 세상을 뒤집고 바꿔나가겠다는 혁명가적 기질이 넘쳤다. 혁명가는 다정다감하다. 세상의 희로애락을 관통하는 격렬한 열정을 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꿈과 감성, 유머와 상상력이 박 대통령의 내면에 흘렀다. 대통령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이 피어오른다.

1977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딸 근혜가 붓글씨 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중앙포토

1977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딸 근혜가 붓글씨 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중앙포토

내가 육사를 마치고 육본 정보국에 배치돼 박 대통령을 만났던 1949년 6월, 박정희 문관의 첫인상은 ‘조그맣고 새카만 분’이었다. 대통령은 자신의 작은 키를 농담의 소재로 삼곤 했다. 70년대 중반 내각에 박 대통령보다 키가 작은 사람으로 김용환 재무장관이 있었다. 대통령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김 장관을 자기 옆으로 부르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서로 키를 견주는 동작을 한 다음, “자, 봐. 김 장관이 나보다 작지?” 하면서 씩 웃으면 분위기가 쾌활하게 바뀌었다.

🔎 인물 소사전: 김용환(1932~2017)

충남 공주고, 서울대 법대를 나와 박정희 시대의 개발연대를 이끈 대표적인 경제 관료. 박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1974~78년 재무장관을 지냈다. 혁신적 재정조치였던 8·3사채동결(72년)과 부가가치세 도입(78년)을 주도했다. 88년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 소속 국회의원(대천-보령)으로 정계에 진출한 뒤 4선 의원을 했다. 97년 이른바 DJP 공동정권의 산파역이었으며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 시절 비상경제대책위원장을 지냈다.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 원로 자문모임인 이른바 7인회의 수장이었다.

박 대통령은 골프를 좋아했는데 필드에 나갈 때 자외선 방지용 선크림을 유난히 많이 발랐다. 나는 그럴 때마다 ‘까무잡잡한 그 살갗에, 바르나 안 바르나 똑같은 것 아닌가’라며 혼자서 웃곤 했다.

78년 박 대통령이 진해 저도 휴양지에서 강아지 ‘방울이’를 들고 있다(사진 왼쪽). 72년 3월 박 대통령이 김용환 상공 차관을 임명하면서 보낸 축하 편지(사진 오른쪽). 중앙포토

78년 박 대통령이 진해 저도 휴양지에서 강아지 ‘방울이’를 들고 있다(사진 왼쪽). 72년 3월 박 대통령이 김용환 상공 차관을 임명하면서 보낸 축하 편지(사진 오른쪽). 중앙포토

박 대통령은 골프를 정확하게 또박또박 치는 스타일이었다. 골프라는 게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해서 잘나갈 때 흥분하지 않고 안 나갈 때 자기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 박 대통령은 18홀 내내 공을 자로 잰 듯이 반듯하게 맞춰 쳤다. 공이 날아가는 거리에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대통령은 보기 플레이어(90타 전후)였다. 대통령은 골프를 할 때 돈내기를 하지 않았다. 내기 자체를 싫어했다. 화투조차 쳐본 적이 없다. 농한기 때 농민들이 심심풀이 화투를 치면서 게으름과 퇴영적인 정신세계에 빠져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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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은 즐거운 마음으로 스트레스를 안 받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골프장의 잔디를 밟으면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자연경관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린에 공을 올린 뒤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홀을 겨냥해 요리조리 신경 쓰는 퍼팅은 싫어했다. 홀 마감을 ‘온 그린’ 후 제2타로 끝내는 게 박 대통령의 골프 스타일이었다. 그렇다 보니 대통령의 퍼팅 실력은 늘지 않았다. 막내 외아들 지만이는 청소년 시절 박 대통령, 나와 함께 골프를 친 적이 종종 있었다. 아들이 그린에서 한 번에 공을 홀컵에 집어넣자 박 대통령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야, 지만이가 골프 신동이네”라며 좋아했다.

75년에 찍은 가족사진. 왼쪽부터 박 대통령, 지만, 근혜, 근영. 중앙포토

75년에 찍은 가족사진. 왼쪽부터 박 대통령, 지만, 근혜, 근영. 중앙포토

대통령은 사전에 팀을 짜서 골프장에 나가는 일이 별로 없었다. 파트너가 대통령에게 억지로 끌려왔다는 느낌을 갖는 걸 원치 않았다. 골프장에 도착해 그날 운동하러 온 사람들 명단을 죽 훑어본 다음 아는 사람들을 찾아 동반자로 초청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단골 골프장은 뉴코리아, 서울, 뉴관악, 태릉 군골프장이었다. 클럽하우스에선 막걸리와 사이다를 섞어 만든 ‘막사이다’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