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내고 싶지 않은 장갑 꺼냈다…폭설 지리산, 김미곤의 기억

  • 카드 발행 일시2023.11.21

지리산에 올해 첫눈이 내렸다. 첫눈이 대설이다. 지난 16일부터 사흘 동안 내린 눈은 북쪽 들머리인 경남 함양 백무동에 7㎝(18일 오전 기준)가 쌓였고, 천왕봉(1915m) 오르는 전진기지인 장터목(1653m)엔 30㎝가 쌓였다. 이날 천왕봉을 다녀온 한 산행객은 “배꼽까지 찬 곳도 있었다”고 했다. 대설 특보가 내려진 지난 17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집중적으로 내렸다.

 지난 18일 오전, 경남 함양군 지리산 백무동 계곡을 오르는 김미곤 대장. 이날 장터목대피소 인근 등산로는 눈이 무릎 높이까지 쌓인 곳도 있었다. 김영주 기자

지난 18일 오전, 경남 함양군 지리산 백무동 계곡을 오르는 김미곤 대장. 이날 장터목대피소 인근 등산로는 눈이 무릎 높이까지 쌓인 곳도 있었다. 김영주 기자

17일 밤, 지리산 심설 산행을 위해 8000m 14좌를 완등한 김미곤(51) 대장과 함께 고속도로를 달렸다. 이튿날 백무동에 도착해 입산이 허가되는 오전 4시에 산행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지리산의 주요 탐방로는 산불조심 기간(11월 15일~12월 15일) 동안 대부분 통제되지만, 백무동과 중산리(경남 산청)는 열려 있다.

서울과 백무동의 중간쯤인 덕유산휴게소(대전-통영고속도로)를 달릴 때쯤 눈발이 매섭게 날렸다. 불현듯 ‘이쯤 되면 지리산 전체가 통제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어 기상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역시나 오후 11시10분을 기해 지리산 일원에 ‘대설특보’가 내려졌다. 특보(대설·태풍·집중호우 등)가 발효되면 국립공원 입구는 통제된다.

하지만 이대로 뒤돌아서기엔 아쉬웠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연락하니 “강설은 새벽 5시까지로 예상되고, 이후 탐방로 상황에 따라 개방 여부를 결정한다”고 했다. 열릴 가능성이 있었다. 차를 지리산IC 근처 모텔에 대고 방을 잡았다.

밤새 기상청 홈페이지를 쳐다보던 중 오전 6시 10분쯤 “특보 해제” 알림이 떴다. 곧바로 백무동으로 달렸다. 백무동탐방지원센터 주차장에서 겨울 산행 채비를 단단히 하고 길을 나서려고 하는데, 먼저 올라간 산행객들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공단 직원의 말이) 특보는 해제됐지만 입산 허가는 아직이랍니다. 언제 해제될지 모른대요. 오늘 중으로 될지, 안 될지….”

중앙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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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먹빛이었다가 해가 나왔다가 오락가락했다. 하지만 다시 눈이 온다는 예보는 없었다. 지인에 따르면 이날처럼 새벽에 눈이 그칠 경우 그날 정오를 전후해 해제되는 게 일반적이라고 했다. 반면에 같은 처지에 있던 대부분의 산행객은 “언제 해제될지 모른다”는 백무동탐방지원센터 직원의 말에 차를 돌렸다. 기다리던 이들 중엔 탐방센터 앞 게이트를 우회해 몰래 입산한 이도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러나 이는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산행이 안전보다 우선일 수는 없다.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탐방센터 앞을 기웃거리던 오전 10시쯤 탐방센터 직원이 내려와 “입산 허가”를 알렸다. 함께 기다리던 등산객 3명과 함께 그날 처음으로 게이트를 통과했다. 폭설이 내려 통제된 국립공원 탐방로에 ‘1번 주자’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기다림.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왔다. 지리산국립공원 홈페이지엔 10시3분에 “탐방로 개방” 게시글이 떴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기다림 뒤에 ‘눈꽃 세상’ 선물    

지리산 백무동에서 장터목대피소로 오르는 김미곤 대장. 김영주 기자

지리산 백무동에서 장터목대피소로 오르는 김미곤 대장. 김영주 기자

백무동 계곡 초입은 순백의 세상이었다. 참나무와 소나무가 주종을 이룬 숲은 흰 눈을 가득 머금고 있었고, 탐방로 바닥은 푹신할 정도로 신설이 깔렸다. 한 굽이 한 굽이 산길을 돌 때마다 “우와” “이야”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산 아래서 세차게 불던 바람도 계곡 안으로 들어서니 잦아들었다. 전날 오후 10시에 집을 나서 백무동 입산까지 12시간의 기다림에 대한 보상으로 충분했다.

지난 18일 김미곤 대장이 눈 쌓인 지리산 백무동 계곡을 걷고 있다. 김영주 기자

지난 18일 김미곤 대장이 눈 쌓인 지리산 백무동 계곡을 걷고 있다. 김영주 기자

‘러셀(맨 처음 눈길을 치고 나아가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됐다. 앞서 탐방로를 점검한 국립공원 직원의 발자국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김미곤 대장은 “러셀을 하느냐 안 하느냐는 체력적으로 차이가 크다. (러셀 산행은) 두세 배 더 힘들다”고 했다.

김미곤 대장은 한국 산악계가 배출한 7명(엄홍길·박영석·한왕용·김재수·김창호·김미곤·김홍빈)의 ‘히말라야 8000m 14좌 완등’ 산악인 중 한 명이다. 2018년 완등할 당시 전 세계 40번째였다. 확률로 치면 ‘1억분의 1’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