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통 들키자 남편 음낭을…” 한 여자만 50년 쓴 실록 속내

  • 카드 발행 일시2023.11.16

⑨ ‘500년 실록’ 현대어로 옮기는 고전번역가들㊦

사람들끼리 역사적 사실을 두고 “그럼, 실록에서 찾아보자”고 내기하는 경우가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웹서비스에서 검색해 안 나오면 “거봐, 사실이 아니잖아” 이런다. 실록에 기록이 없다고 벌어지지 않은 일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조선시대 역사 기록물이 실록만 있는 것도 아니다.

『승정원일기』가 대표적이다. 조선 초부터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다. 아쉽게도 임진왜란(조선 전·후기를 가르는 기점) 등으로 전기 기록은 불타 없어졌다. 정조(재위 1776~1800)가 세손 시절부터 쓴 일기에서 출발해 공식 기록물이 된 『일성록』도 있다. 임금의 동정과 국정 제반 운영 사항 등을 매일매일 담았다. 실록과 달리 필요 시 왕이 그때그때 참고할 수 있었다는 게 특징이다. 역시 조선 후기 기록만 남아 있다.

조선 500년사가 포괄적으로 담긴 기록물은 실록이 유일하다. 무엇보다 실록은 왕의 사후에 한 시대를 총체적으로 압축해 편찬했다는 점에서 당대의 역사 인식을 반영한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조선왕조실록 번역 현대화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번역자들은 “일성록의 보름치가 실록의 두 달치와 맞먹고, 승정원일기 사나흘치가 실록 두 달치 분량”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실록에 기록할 정도면 그 시대의 중요한 사안이나 관심사였다고 볼 수 있죠.”

오대산사고본 중종실록 권41-42. 임진왜란 후 가까스로 살아남은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추가 제작할 때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은 최종 교정쇄본을 오대산사고에 보관했다. 당시 사관들이 손수 빨간 글씨로 교정한 흔적이 남아 있는 귀한 자료다. 사진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오대산사고본 중종실록 권41-42. 임진왜란 후 가까스로 살아남은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추가 제작할 때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은 최종 교정쇄본을 오대산사고에 보관했다. 당시 사관들이 손수 빨간 글씨로 교정한 흔적이 남아 있는 귀한 자료다. 사진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그런 점에서 조선 전기에 ‘졸기’를 빌려 여성의 음행(淫行)을 마치 눈으로 본 듯이 서술한 경우는 이채롭다. 앞서 예시한 단양군사 남의(南儀)의 아내 이야기(☞음탕한 관료 부인도 기록됐다, 조선왕조실록 ‘집요한 번역’) 외에 세종실록에 기록된 이지(李枝)의 후처 이야기도 주목할 만하다. 최소영 연구원에 따르면 이 여인은 조선 제2대 임금인 정종실록에 조화(趙禾)의 아내 김씨라며 첫 등장해 제7대 세조실록까지 약 50년간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조화가 숨진 뒤 이지와 재혼하는데 태종실록엔 다음과 같은 기사(기록)가 전한다.

“사헌부에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지(李枝)를 탄핵하였으니, 고(故)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조화(趙禾)의 아내 김씨(金氏)에게 장가든 때문이었다. 김씨는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김주(金湊)의 딸로, 아름답고 음란하였는데 나이들수록 더욱 심해졌다. 형제와 어미가 모두 추한 소문이 있었다.…”(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 11월 1일 갑오 두 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 번역 현대화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김옥경(61) 고전번역실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책임연구원, 김현재(41) 조선왕조실록번역팀장, 최소영(35)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연구원(왼쪽부터). 김종호 기자

조선왕조실록 번역 현대화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김옥경(61) 고전번역실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책임연구원, 김현재(41) 조선왕조실록번역팀장, 최소영(35)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연구원(왼쪽부터). 김종호 기자

“간통한 처가 들키자 남편의 음낭을…” 세세히 기록

그러다가 세종실록(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1월 3일 임진 두 번째 기사)에 ‘영돈녕부사로 치사한 이지의 졸기’ 중에 김씨가 등장하는데, 이지가 사망에 이른 원인이 몹시 구체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