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10박스 뒤져 한땀한땀 뀄다…비로소 찾은 ‘왕비의 뒤꿈치’

  • 카드 발행 일시2023.11.02

⓻ 무령왕릉 파편유물 꿰맞춘 최기은 학예사

지금 국립공주박물관에선 무령왕(재위 501∼523)의 서거 1500주기를 기념하는 특별전 ‘1500년 전 백제 무령왕의 장례’가 열리고 있다. 오는 12월 10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는 장례를 주도한 아들 성왕(재위 523∼554)의 시선으로 꾸민 게 특징이다. 국보 12건(17점)이 쏟아진 무령왕릉 출토품 가운데 주요 유물뿐 아니라 백제 의례 관련 유물까지 총 126건, 697점을 선보이고 있다.

1971년 7월 발굴 후 그해 9월에 나온 ‘무령왕릉 조사 중간보고’는 유물을 2500여 점으로 기록했다. 2021년 50주년 전시 때는 출토 유물이 5200여 점으로 명기됐다. 1500년의 봉인 끝에 해제된 무덤 유물이 실제로 늘었을 리는 없다. 발굴 후 반세기 동안 무령왕릉 유물 연구가 쉬지 않고 세대를 넘어 심화된 결과다.

이 변화된 숫자 뒤에 유물 파편을 ‘한땀 한땀’ 꿰맞춘 손길들이 있다. 알려진 대로 무령왕릉 발굴은 예기치 않은 발견에 따른 흥분과 과욕 탓에 ‘도굴’ 수준으로 황급히 진행됐다. 당시 기본 실측조사 후에 큼직하게 눈에 띄는 유물은 정리해서 실어냈지만 바닥 잔존물과 자잘한 유물들은 쌀포대(가마니)에 쓸어담아 빼냈다. 이 파편 유물들은 수십 년간 박물관 수장고 한쪽 구석에서 잠들었다. 당시로선 박물관 공간도, 이를 처리할 전문가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2002년 11월에 보존처리 요원(별정직 7급)으로 국립공주박물관에 입사했는데, 수장고를 둘러보니 한쪽 구석에 박스가 10개쯤 쌓여 있어요. 열어 보니 한 곳엔 초본류(풀뿌리 등)가 한가득, 다른 곳엔 금속류나 신발 파편 등이 반찬통 같은 데 담겨 있었어요.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무령왕릉 잔존 유물이구나 했지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의 관꾸미개(국보). 얇은 금판을 오려 인동꽃 무늬를 맞새김했다. 2점이 하나의 관꾸미개를 이룬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의 관꾸미개(국보). 얇은 금판을 오려 인동꽃 무늬를 맞새김했다. 2점이 하나의 관꾸미개를 이룬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에서 근무하는 최기은(49) 학예연구사의 말이다. 사학을 전공해 학부 시절부터 여러 박물관에서 유물 관련 아르바이트를 했던 그는 무령왕릉 발굴의 전설 같은 후일담을 익히 알고 있었다. 2004년 공주박물관이 현재의 위치인 웅진동에 신축 이전해 작업공간이 확보되자 파편 유물들을 분류하고 분석·재조합하는 작업에 나섰다. 연구보조원과 담당 학예사가 수차례 바뀌는 동안 꼬박 15년을 매달렸다.

“발굴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직원들이 수장고 유물을 정리하고 보고서를 여러 차례 다시 냈다. 실수가 많았던 발굴이 하나의 반면교사 역할,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발굴 당시 막내 학예사보로 참여했던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이처럼 한국 고고학사를 바꾼 무령왕릉 발굴은 50여 년 전 끝난 게 아니라 박물관 안에서 계속되고 있다. 선배들의 과오마저 ‘헤리티지’로 받아들여 1500년 전 유물의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낸 이들을 만나보자.

최기은 학예연구사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무령왕릉 출토 유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2점이 한 쌍을 이루는 왕비 관꾸미개(국보)는 출토 당시엔 한쪽의 꽂이(아래 손잡이 같은 부분)가 떨어져나간 상태였는데, 잔존 유물을 꿰맞추는 보존처리를 거쳐 현재와 같이 복원됐다. 장진영 기자

최기은 학예연구사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무령왕릉 출토 유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2점이 한 쌍을 이루는 왕비 관꾸미개(국보)는 출토 당시엔 한쪽의 꽂이(아래 손잡이 같은 부분)가 떨어져나간 상태였는데, 잔존 유물을 꿰맞추는 보존처리를 거쳐 현재와 같이 복원됐다. 장진영 기자

(※ 이 기사의 말미엔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중앙일보가 2021년 초 진행했던 지건길 전 관장과의 특별 인터뷰 영상이 수록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