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미륵사지 석탑 복원 진두지휘한 배병선 단장
」서울에서 KTX를 타고 1시간30여분 달려 도착하는 익산역. 다시 차로 10여 분 더 가면 미륵사지가 나온다. 야트막한 전북의 산이 둘러싼 휑뎅그렁한 들판이다. 군데군데 옛 절터를 암시하는 주춧돌(정확히는 장초석)이 있고 입구에 당간지주가 서 있지만 눈길을 잡아끄는 건 뭐니뭐니해도 동서 양측의 두 탑이다.
한데, 둘의 동거가 어색하다. 9층짜리 동탑은 상륜부까지 ‘완전체’일지라도 하얗고 매끈한 게 기계로 찍어낸 느낌이다. 6층에서 멈춘 서탑은 일부 탑신(몸돌)과 옥개석(屋蓋石, 지붕 모양의 부재)이 없어 반쪽짜리 모양새지만 세월을 탄 때깔이다. 둘을 한 쌍으로 두는 게 맞나 싶을 정도다.
이들 가운데 비록 반쪽이라도 1400년 자취를 간직한 서탑만이 ‘미륵사지 석탑’으로 불린다(이하 미륵사지 석탑을 석탑이라고만 쓸 땐 모두 서탑을 말한다). 1993년 ‘복원’된 동탑을 문화재로 언급하는 이는 거의 없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상태의 동탑을 9층으로 설계하고 쌓는 데 3년 걸렸다. 반면 한쪽 벽면에 콘크리트를 덕지덕지 바른 채 버티고 있던 서탑을 해체·수리해 지금 모양으로 만드는 데는 20년이 걸렸다. 단일 문화재 수리로 최장 기록이다. 비용도 230억원이 들어 숭례문 복구(약 250억원) 다음으로 많다.
육안에도 확 다른 동탑과 서탑의 복원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이를 들여다보기 위해 석탑(서탑) 복원사업 20년 가운데 14년을 관여한 배병선(63) 전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사업단장을 만났다. 석탑 복원은 1999년 문화재위원회가 해체 보수를 결정하면서 시작돼 2001년 국립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재연구원)로 실무가 이관됐다. 연구소 건조물실장(현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이던 배 단장이 실무 지휘봉을 잡은 건 2004년. 탑 상부 해체가 이뤄지고 있던 시점이다. 이때부터 단장 직함만 통틀어 11년간 수행했다. 특히 2009년 탑 안에서 1400년 전 안치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면서 석탑은 대대적인 뉴스의 중심에 선다. “유물 복이 따로 있다고들 하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흥분의 순간이었다”고 배 단장은 돌아본다.
사리장엄구 가운데서도 특히 금판으로 제작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는 “백제사를 다시 쓸 정도의 엄청난 발굴”(이병호 동국대 교수)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밝혀진 내용 때문에 익산의 자부심이던 서동요와 선화공주 설화는 낭패를 봤다. 무슨 일인 걸까. 동탑은 왜 천덕꾸러기가 된 걸까. 서탑 복원엔 왜 20년씩 걸린 걸까.
이에 답하는 과정에서 지난 수십년 새 문화유산 복원을 둘러싼 시대상의 변화가 읽힌다. 앞으론 어떤 복원이 바람직한지 생각할 거리도 안게 된다. 먼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탑, 미륵사지 석탑을 만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