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백두대간’ 신화 남난희…“걷다가 죽고 싶다”는 그 산

  • 카드 발행 일시2023.10.10

지리산을 등지고 섬진강을 바라보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용강리, 마을 꼭대기에 들어앉은 남난희(66)씨의 집은 세상 어느 ‘전망 좋은 곳’보다 전망이 좋았다. 멀리 섬진강 끝 광양 백운산(1222m)의 윤곽이 또렷이 보였고,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면 지리산 삼신봉(1289m) 자락에 있는 불일암·불일폭포 자리를 점칠 수 있을 정도로 산 능선이 부챗살처럼 펼쳐졌다. 집 뒤편으론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를 이루는 황장산(947m) 능선이 시작된다. 집을 나서면 어디든지 지리산 품 안이다. 또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유장하게 흐르는 한반도 산줄기, 백두대간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지난 3일 이 집 툇마루에 앉아 주인장이 직접 덖은 차를 맛보았다. 뒤꼍이 바로 차밭이다.

집 뒤 차밭에서 바라본 남난희씨의 집. 멀리 지리산 삼신봉 산자락이 보인다. 김영주 기자

집 뒤 차밭에서 바라본 남난희씨의 집. 멀리 지리산 삼신봉 산자락이 보인다. 김영주 기자

그는 집에서 맞은편 불일암까지 왕복 9㎞를 거의 매일 걷는다. 지리산으로 내려온 20여 년 전 찻집을 운영한 후 전통차와 된장 등을 만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무 일도 안 하고” 매일 아침 집에서 불일암까지 걷기만 한다.

나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됐어요. 지금은 별 하는 일 없이 지내지만, 그래도 일상이 고맙고 매일 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걷지요. 걷는 게 일상이 되면서 산속 수행, 삶 속의 수행이 됐어요. 죽을 때까지 이 길을 걷고 싶고, 죽는 날 아침도 걷다가 죽고 싶습니다.

지난 3일 남난희씨가 경남 하동군 쌍계사에서 불일암 가는 길을 걷고 있다. 그는 매일 아침 이 길을 걷는다. 김영주 기자

지난 3일 남난희씨가 경남 하동군 쌍계사에서 불일암 가는 길을 걷고 있다. 그는 매일 아침 이 길을 걷는다. 김영주 기자

그는 스물일곱 살이 되던 1984년 1월 1일 부산에서 출발해 강원도 진부령까지 백두대간(태백산맥) 591㎞를 76일간 홀로 걸었다. 길인지, 구덩이인지 모를 흰 설원 위를 군사지도 한 장과 나침반에 의지해 길을 찾았다.

20대 여성이 홀로 30㎏의 배낭을 메고 도전한 산맥 종주는 당시 한 신문에 연재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백두대간이란 말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기도 전이니 그럴 만도 하다. 나중에 ‘하얀 능선에 서면’으로 출간된 이 산행기가 지금 백두대간 종주의 시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산악인으로 네팔 강가푸르나(7455m)를 세계 여성 최초로 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돌연 해외 원정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와 자연학교와 걷기학교 등을 열며 자연 속에서 살았다. 지금은 지리산에서 홀로 지낸다.

삶 속 수행, 불일암 가는 길  

쌍계사 불일암 평상에 앉아 있는 남난희씨. 매일 아침 이곳까지 걷고 차 마시고 기도한다. 김영주 기자

쌍계사 불일암 평상에 앉아 있는 남난희씨. 매일 아침 이곳까지 걷고 차 마시고 기도한다. 김영주 기자

그의 집에서 불일암 가는 길은 용강리 마을로 내려가 쌍계1교를 넘어 쌍계사 일주문 오른편으로 이어진다. 30분 정도 오르면 산속 평지, 불일평전이 나타난다. 예전 어느 노인이 이곳에 움막을 짓고 도인처럼 살았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쌍계사에서 간이매점을 할 요량으로 움막을 짓는 중이다. 오래전 불일평전은 도교에서 이상향으로 치는 ‘청학동(靑鶴洞)’으로 불리기도 했다. 사방 큰 산으로 둘러싸여 은거하기 좋은 데다 실제 평전에 들면 아늑함이 몸으로 느껴진다.

평전에서 10분 정도 올라가면 불일폭포, 폭포 가기 전 왼편에 불임암이 있다. 남난희씨는 주인 없는 불일암 마당 평상에 앉아 찻병을 꺼냈다. 이번엔 그가 손수 구증구포(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는 방식)했다는 구기자차다. 맑은 갈빛으로 우러난 차에서 구수한 맛이 진동했다.

“사람들은 가끔 ‘그동안 가본 산 중에 어느 산이 가장 좋냐’고 묻곤 해요. 그런 산이 있을까요?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곳이 가장 좋은 산이지요. 그만한 것이 없어요. 이 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으니까. 간혹 고민이 있을 때 이 길을 걷다 보면 답이 명료하게 나오곤 합니다. 그래서 땅(집)에선 복잡한 일을 고민하지 않아요. 여기만 올라오면 복잡한 게 정리되고 답이 나오니까. 이렇게 온전하게 산과 있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한학자였던 아버지가 써준 '충서(忠恕)' 글씨가 대문 앞에 걸려 있다. 김영주 기자

한학자였던 아버지가 써준 '충서(忠恕)' 글씨가 대문 앞에 걸려 있다. 김영주 기자

경북 울진 산골 마을, 외가와 친가 모두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남난희는 집안 소유의 “송이 산을 지키는” 산골 소녀로 유년을 보냈다고 한다. 송이도둑을 지키느라 집 뒤 야산을 수없이 오르내렸던 게 산악인으로서 기본 바탕이 됐다. 이후 경남여상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던 1980년, 어쩌다 ‘지리산 화엄사’ 안내 산행 버스를 탄 후 산에 빠졌다. 산을 올라 보니 자신이 산에 늘 다니던 ‘아저씨들’보다 체력이 더 좋다는 걸 알게 됐다.